「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중략)…야, 원식아, 별수없다. 왜정 때는 그래도 일본말이 출세를 하게 했고 이제는 노어가 또 판을 치지 않니.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바에야 그 물 속에서 살 방도를 궁리해야지. 아무튼 그 노서아 말 꾸준히 해라(중략)…어디 코큰 놈이라구 별것이겠니, 말 잘해서 진정이 통하기만 하면 그것들두 다 그렇지……」

지금은 고전이 됐지만 60년대 국내 단편소설 가운데 전광용의 ‘꺼삐딴 리’ 라는 작품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파, 해방 직후의 북한에서는 친소파, 월남 후에는 친미파로 시류에 편승해 영화를 누리고 살았던 한 인물의 이야기다.

‘꺼삐딴’ 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캡틴(captain)’ 에 해당하는 러시아말로 어떤 시대를 만나든지 카멜레온처럼 변절하며 잘 살아가는 인물을 지칭한다. ‘꺼삐딴 리’ 와 같은 인물들의 특징은 강한 생명력에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꺼삐딴들은 행복하게 살아남았다. 일제 강점기 때도, 한국전쟁 때도, 군부독재정권 때도 절묘하게 야합하면서 권세와 영화를 누렸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지다. 이권이 있는 곳에는 항상 또아리를 틀고 앉는다.

작가는 ‘꺼삐딴 리’ 로 불리는 주인공을 비판하고 비꼬면서 그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기회주의자인 주인공을 캡틴으로 칭한 것은 여기 저기 붙어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는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조롱이자 해학이다.

소설 속의 꺼삐딴 리는 대세에 편승,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바쁜 인물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영달을 위해 당을 마음대로 이적하고 변절하는 의리 없는 정치인들 역시 현대판 꺼삐딴 리다.

우리 보령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철새들의 날개짓이 시작된 지 이미 오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새로운 정당의 공천을 받아보려는 인사들로 넘쳐난다.

그렇다면 중요 고비 때마다, 또 정치환경이 변할 때마다 거취를 옮겨야 하는 정치인들이 양산되는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정치학자들은 정치인의 소신 결여와 조석변개(朝夕變改)하는 정치환경이 철새정치인을 양산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정치적 소신이 결여됐을 때 나오는 ‘변절’ 을 주 요인으로 보고 있다.

현대판 ‘꺼삐딴 리’들의 특징은 원칙이나 소신이 없다는 것이다. 부조리와 부당함에 준거(峻拒)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다. 아무리 엄혹한 시대라도 진실의 힘, 역사의 거센 물길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설 ‘꺼삐딴 리’의 교훈은 정치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적어도 부조리와 부당함을 준열히 거부할 줄 아는 시민정신이 살아있어야 희망이 있다.

앞으로 6개월 남짓 남은 지방선거마저 제2, 제3의 ‘꺼삐딴 리’들이 출몰한다면 주민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꺼삐딴 리들의 출몰’ 우려는 그저 우려로 끝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