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9일 새벽, 산악인들의 우정과 의리, 그리고 주검과 나눈 뜨거운 약속이 빚어낸 ‘설상(雪上)의 노래’가 전 세계 산악인들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지난 2004년 5월 18일, 초모랑마봉(Chomolangma, 8,848m 에베레스트의 티벳 명칭)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다 설맹(雪盲) 등의 사고로 귀환하지 못한 박무택·장민 대원을 구조하러 나선 백준호 부대장 또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엄홍길 등반대장이 이끄는 ‘2005.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의 성공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의 상대는 자신의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든 에베레스트. 특히 50여m의 깎아지른 절벽을 시신과 함께 내려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의 목숨을 건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엄 대장은 ‘시신만은 꼭 수습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절벽에 매달려 눈 사람으로 변한 고 박무택 등반대장의 시신을 찾아 목숨을 걸고 운구하다가 악천후 때문에 포기하고 임시 돌무덤을 만들어놓고 내려왔다고 한다. 산처럼 무거운 산 사나이들의 만년설(萬年雪)에 새겨진 약속은 기온이 바뀌어도 녹을 줄은 모른다.

이와는 반대로 약속을 하기는 잘 하는데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는 정치인이 으뜸일 것이다. 못 지킬 약속인 줄 뻔히 알면서도 해 놓고서 나중에는 상황논리로 둘러댄다. 그 상황에서는 진실이었다거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는 궤변(詭辯)을 늘어놓는다.

정치인들의 ‘거짓말 퍼레이드’는 다양하고 화려(?)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서울을 사수(死守)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한 밤중에 서울 시민들을 사지(死地)에 남겨놓은 채 대전으로 도망을 갔고, 민정이양을 약속하더니  군복을 벗고 대통령이 됐고, 단임을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다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한 박정희, 해외여행을 다니며 골프를 즐기면서도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안 된다는 전두환, 대통령이 되면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떠들다 대통령이 되니까 혼란과 국가적 손실이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국민들을 속이고, 정치자금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하더니 구속되어 조사를 받아보니 수천억을 해먹은 노태우. ‘구국의 결단’이라며 정치적 야합의 본보기를 보인 김영삼,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거짓말의 백미는 92년 대선에서 패배하자 정계를 떠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영국으로 떠났다가 95년 다시 돌아와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이다.

또 SK로부터 단돈 1원도 받지 않았다고 잡아떼다가 당의 지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며 100억원 수수를 시인한 최돈웅,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면 제1진과 함께 현지로 떠나 한 달간 사병으로 근무하겠다던 홍사덕.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방선거가 이제 꼭 1년 남았다. 어떤 정치인이 어떤 약속을 하고, 어떤 거짓말을 늘어놓을까 기대(?)가 된다. 이제라도 약속 안 지키고 거짓말하는 정치인은 철퇴를 가해서라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일에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거짓의 흥청거림에서 구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