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물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밑바닥부터 한 동이씩 채워가듯 또 한 해를 보내고 새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늦가을에 농부가 보리씨를 뿌리고 싹이 돋은 채 겨울을 맞는 논을 바라보며 우리 아버지를 떠올려 본다.

어느 저녁 어스름이 깔릴 때 아버지께서 돌아오지 않으시면 아랫마을 주막집 근처에서 서성이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면 동생과 함께 양쪽으로 손을 잡고 올라오면 항상 말씀 대신 우리들의 손을 힘껏 잡아 주실 때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집에 와서 마루에 앉으시면 제일 먼저 엄마를 염려 하셨다. 평소에 엄마가 옆에 계시면 바쁜 일손과 급한 성격 때문에 큰소리도 치시지만 약주를 드신 후에는 한 없이 이해심 많고 엄마만을 위하신 아버지의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일손이 바쁘신데 엄마 늦게 오시면 화 안 나셔요?”하면 “야! 엄마만 기다리다 보면 빨리 늙제. 때가 되면 돌아 올 것이고 차를 갖고 다닌께 그것이 걱정이 되제” 하신다. 신랑이 처음 선을 보러 올 때를 회상하면 무서운 장모님보다 과묵하신 아버님이 더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오고가는 술잔의 횟수가 더해감에 따라 마음 됨됨이를 보시려는 아버지 마음에 서서히 괜찮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여보게 다른 것은 걱정이 안 되네. 너무 교회만 믿지 말소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야제.”하셨다고 하신다.

이렇다 할 종교는 갖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인정 많은 분이기에… 어렸을 때 나에게 아버지는 커다란 버팀목으로 항상 계셨던 것 같은데 이제는 외소해진 모습 앞에서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살이 경험으로 얻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커다란 진리로 항상 되새겨진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 저는 다음에 시부모님 모시고 살래요”하면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인생이 풀잎에 이슬인데 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 하셨다.

“우리부모님 같은 분을 모시지 않는다고 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요. 제가 먼저 남의 부모님을 모시면 누군가도 우리 부모님을 모신다고 하지 않겠어요?”

아버지께서는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셨지만 그때 나는 벌써 나의 말에 스스로 짐을 끌어안은 것 같이 꼭 그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약주를 좋아하셔서 우리 딸이 돈을 벌면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술하고 고기만 사오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휴가를 받아 좋은 술과 담근 술을 꼭 챙겨가지고 가면 절대 혼자 드시지 않고 나눠드시고 싶어서 “여보게 귀한 술이 있네. 한잔하고 가게나, 아주 좋다네.”하시며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드셔서 맛을 보이셨다.

“아버지 약술은 혼자 드셔야 한데요”해도 한사코 안 되신다. 아버지 마음은 나누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사람이 인정이 많으면 자신이 참 복잡하다”하시면서도 사람들을 보면 반가워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 하신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자주 오시는 동네 어른들로 시간과 공간을 빼앗긴 우리들의 입이 뾰로통 나와 있으면 “아버지가 있으니께 오제. 이해해라”는 말씀에 우리들은 “맞구나”하며 수긍을 하곤 했다. 농사가 비바람에 벼가 넘어지고 논둑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아버지께서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그래도 나는 괜찮다”하시며 낙관적인 성품으로 여유를 갖으실 때 마음이 놓인다.

아버지께서는 부잣집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지만 복잡한 어른들 사이에 싸움으로 인하여 외갓집에서 묵묵히 일만 하시며 희노애락을 풀어놓아야 하셨을 것이다. 이제 곧 아버지 생신이 다가온다. “너희들이 너무 보고 싶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야야 너희들 좋게 살아라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다.” “젊어서는 부부 정이지만 나이 먹으니 너희들 오는 날만 기다려 지더라”는 말씀이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아버지의 그 마음을 다 채워드리지 못한 것이 한없이 죄송하지만 아버지께서 평안한 마음을 갖으시길 바라며 올해에는 우리 아버지 마음 밭에 작은 믿음의 씨앗이 돋아나길 소망 하여본다. 그리고 바쁜 일상 속에서 가족과 대화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더욱 따뜻한 둥지로 여겨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보령도서관주부문학회보령예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