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수면 위 물살을 가르며 노니는 한 무리의 청둥오리, 일사불란하게 한 줄로 나아간 자리 파문이 일어났던 곳은 이내 잔잔해진다.
아침햇살을 이고 채색으로 물든 야산의 풍경이 투영된 저수지에는 몽실하게 물안개가 쉼 없이 피어올랐다. 모든 피조물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대미 했건만, 이제 겨울 문턱에 접어들면서 고혹적이고 화사했던 정경은 어느새 쓸쓸하니 다소 칙칙한 느낌이다.
늘 반복되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젊어서 와는 또 다른 사색에 잠기게 된다.
고즈넉한 호수 주변을 드라이브만 한다면 가벼운 마음이겠지만 저수지 밑바닥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없듯이 인간의 말로 즉, 그 끝을 헤아려 볼 수 없는 막막함이란 어찌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으랴!
올 가을만해도 벌써 이 길을 몇 번을 오르내렸던가.
남편의 큰 누님 댁 일가족이 삼십년을 넘게 서울에서 살다가 오직 병구완을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모진 고생 끝에 이제 좀 살만하더니 뇌종양 수술 후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워 지내는지 벌써 사년 째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발령받았던 장항, 그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 돌, 백일까지 챙겨주며 인척 중에 가장 민첩하게 최씨 집안의 가교 역할을 해오셨다.
형제들 중에 유독 사랑했던 막내 동생의 방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채 그저 TV에만 시선을 고정시킨다. ‘어머니, 삼촌 오셨어요.’라는 조카의 말은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내 마음에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결혼도 미뤄놓고 두 팔 걷어붙인 채 간호를 하지만 우환으로 인해 가중된 경제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조카가 감내 해나가야 할 아픔에 오히려 환자보다 더 마음이 쓰인다. 욕창이 생기지 않게 몸을 수시로 움직여 주물러주는 조카를 보며 그래도 마지막으로 효도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별의 별 일도 다 많은 세상에 조카처럼 변함없이 돌보기도 쉽지 않으리라.
어머니를 보살피는 아들의 손길이 한결같지만 한가정의 구심점인 아내가 환자인지라 식구들의 고생이 극심하다.
얼마 전 읽은 수필집의 작가의 고민과 아픔을 상기해보았다.
사십 여년의 교직생활을 은퇴하고 연금으로 지내니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정작 그녀의 고민은 다름 아닌 뇌성마비 아들이었다. 인생의 황혼 길이 가벼워야 하는데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자립하지 못하는, 아니 수없이 시도해 보았건만 사회의 모든 여건이 장애인들이 자립하기에는 정말 녹록치 않았다.
과로로 인해 일곱 달 만에 출산한 아들의 두뇌는 명석해 영어, 컴퓨터, 한문 등 신체가 건강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지만 정작 그를 받아줄 직장은 아무데도 없었다. 아들이 외출해 집에 돌아올 때까지 노심초사하는 장면을 읽을 때, 이보다 더 못한 상황에 처한 장애인들 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이다.
사지가 제멋대로 흔들려 제대로 설수도 없는 아들을 키우며 어머니는 남몰래 속을 얼마나 태웠을까!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소망은 아들이 천주교에 귀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절대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아서 어머니의 애를 태우고 있다. 아마도 언젠가는 어머니의 뜻을 받들고 살아가리라 믿는다.
요즘 들어 ‘지체 부자유’라는 언어가 주는 의미를 자주 헤아려 본다.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다 문득 수족을 제대로 못쓰는 이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떠올랐다.
어느 날 느닷없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들이 겪어낸 정신적, 신체적인 아픔을 쉽게 상상 할 수 없었다.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눕고 일어나는 것조차도 못하며 고통 속에 한을 삭히며 살아가는 것에 비해, 평소에 건강한 우리네는 이런 자유스런 수족의 몸놀림을 마치 당연한 일인 양 이소중한 행복을 가끔은 간과하기도 한다.
평생 가슴속에 한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 다시 말해 중증 장애인 들을 보면서 더 이상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장산리 언덕을 내려오면서 모래시계의 주제곡으로 러시아 가요인 백학이 연상됐다.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구소련의 혁혁했던 모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이다. 고색창연한 고딕식 건축물만이 그 위용을 증명해주려는 듯 한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국운(國運)이 융성했던 나라들이 쇠퇴해가고 개개인의 생이 스러져감을 보며 생성과 소멸의 순환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우려하기보다, 현재 건강하게 생활 할 수 있음에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보령도서관주부문학모임예지회>
2025.1.14 화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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