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최대의 시인 괴테(J. W. Goeth)는 공포에 가까운 고독에는 강제로라도 누군가와 어울려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어느날 자기 집 식품창고와 식기창고의 열쇠를 모두 가져 오라 하여, 자신의 베개 밑에 숨겨두었다. 끼니때가 되면 가족의 누군가가 뒤주열쇠와 접시며 스푼이나 포크를 얻고자 자신의 고독한 방을 찾아 올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어울림을 좀 더 길게 하려고 빵을 저울에 달아 주기까지 했다니, 황혼의 고독이란 이토록 눈물겹게 외로운 것일까?
어는 날 오후 전차 칸에서 있은 일이다.
황혼이 짙은 할머니 몇 분이 무거운 육신을 이끌고 전철 안으로 들어선다. 바로 뒤에는 초로의 할아버지 한 분이 보호자처럼 할머니들을 챙기며 뒤따라 들어온다. 할머니들은 각자 빈자리에 앉았으나 할아버지는 손잡이에 중심을 의지한 채 투정 섞인 말을 내 뱉는다. "귀나 안 먹었어야 재미있는 얘기나 들려 들이지!"라고 하자, 그 말을 알아들은 할머니가 대꾸를 한다. "총무님도 내 나이 먹어 봐! 늙으면 육체의 기관들이 하나하나 낡아 가는 것을!"
조금 있으려니 장님 한 분이 찬송가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다.
두 노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핸드백 속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 짜기 한 장을 꺼내어 장님의 빈 바구니에 담아 주며 "저런 사람을 도와 줘야돼!"하며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할머니의 육체도 좀 어눌해졌지만 장애인의 고통을 헤아리시는 것을 보면 정신만은 매우 건강해 보인다. 그러나 돈을 받아 가는 장님은 언어 장애가 있는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씁쓸하게 사라진다. 말을 못하면 고개인사는 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하게만 받아들이는 그 장님의 모습을 볼 때 선심을 베푸는 일이 과연 좋은 일인지? 회의에 잠기게 된다.
잠시 후 나는 3호선을 바꿔 탈 수 있는 환승역에 내려서 걸어 갈 때였다. 앞서가던 70대쯤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할머니에게로 다가가서 조심스레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할머니, 어디를 가세요?" 또 "할아버진 어디계신가요?"하고 묻는다.
할머닌 쑥스러워 하시며 "할아버진 벌써 저 세상으로 갔어요."
할아버진 홀로되었다는 할머니의 말에 잡은 손을 더 꽉 잡는다. 아마도 외로운 노인들끼리는 무언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할머니의 모습이나 할아버지의 외모로 보아서는 너무나 정갈하고 고상해 보인다. 예전 같았으면 "이망할 놈의 할방구가!" 하면서 몹시 나무랐을 것이나 할머닌 별로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할머니의 삶도 신세대의 사랑 표현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닐는지!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패션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할아버진 갈색 가을 양복을 입고 여름 망사구두를 신었다. 할머닌 가을스웨터에 검정 모자를 눌러쓰고 반짝이는 여름 주름치마를 입었으나 효도 신발은 뒤축을 꺾어서 슬리퍼처럼 끌고 나왔다. 그러니 늙는다는 것은 차림새에도 무관해지고 명예도 달갑지 않으며, 궁하지만 않으면 돈에 마음쓰고 싶지도 않다는 말이 옳은 듯싶다. 하지만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은 누군가와 어울릴 수 있는 말벗이 필요 한 것 같다.
지하철을 함께 타신 두 분은 노인 석에 나란히 앉아서야 할아버지는 머쓱해 하며 따습게 잡았던 손을 살며시 놓는다. 그 사이 두 분은 다음 데이트 약속을 하셨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헤어진다. 할아버진 겨우 세정거장 할머니와 함께 와서야 할머니를 지하철에 남겨둔 채 먼저 내리셨다. 그러니 두 노인이 함께 있었던 데이트 시간은 겨우 10여분간 이루어 진 셈이다. 출입구로 빠져 나왔던 할아버진 황혼의 가을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세대들이 용기를 내어 적극적인 사랑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황혼의 외로움이 주는 고독이 아닐는지!
전에는 노부부가 등을 긁어 주며 더불어 살다가 할머니가 먼저 죽으면 할아버지가 3년 안에 죽는 확률이 절반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런 죽음을 마고장사(麻姑葬事)라고 했으니, 외로움을 달래려는 노인들의 발길은 날마다 '파고다 공원'으로 밀려온다. 젊었을 때 농부였을 노인이나, 학식이 많아 보이는 노인이나, 직장에서 상사였을 노인도 황혼의 외로운 길목에선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토록 황혼의 노인들은 누군가와 어울리고자 오늘도 공원을 찾아와 서성거리게 된다. 외로움이란 늙어 갈수록 뼈 속으로 스며드는 모양이다.
노경에 행복하려면 첫째가 건강해야 한다. 두 번째는 취미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한 정(情)을 나눌 수 있는 '정신적인 대화자'를 가지는 일이다.
싸르뜨르(J.P. Sartre)는 죽는 시간에도 영원한 우정, 영원한 대화자 보부아르(S.Beauvoir)를 불러서 '장의절차'를 의논했다고 한다. 이제 현대를 사는 노인들이 정신적인 대화자를 찾고자 거리에서 손을 잡는다 해도 웃음거리고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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