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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日순사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방영순(82)할머니
2019년 03월 11일 (월) 11:04:23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지난 2월 말 무렵 보령신문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주인공은 올해 82세의 방영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기자에게 올해 1백주년을 맞는 3.1절을 앞두고 과거 직접 보고 느꼈던 일제치하에서의 기억들을 하나씩 설명해주셨다. 할머니의 기억들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관련된 것도 있었고, 강제징용, 일본이 전쟁준비를 하면서 놋그릇을 공출하던 모습, 일본 순사가 한국인들을 괴롭히던 모습, 해방후 김두한과 함께 홍성에서 만세를 부르던 모습 등 다양하게 이어졌다. 방영순 할머니는 이런 기억들이 이제는 다 잊혀져갈까봐 두렵다며 그때의 기억들을 글로 남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보령신문은 방영순 할머니께서 직접 쓰신 글을 독자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편집자 주>

2019년 삼일절 기념식을 보면서 8.15 해방을 맞았을때 어린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손가락 사이에 무궁화 꽃을 단 모습. 많은 사람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서 그때와 꼭 닮은 꼴로 재연되는 모습에 옛 생각이 생생하게 떠올려 진다. 일제 강점기 해방 전·후로 잊혀 지지 않는 억울함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선망 부모님들께서 고통과 설움으로 사셨던 생각, 나라 뺏기어 슬픔과 억울했던 감정이 지금도 쌓여 있는데 요즘 텔레비전에서 비춰지는 일본 총리의 망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 나이가 여든 둘이니 나의 선배님들은 울분을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된다. 물결은 흐르면서 깨끗이 닦여지지만 앙금은 남아 있기에 지금도 역사 속에 꼭꼭 묻어 두고 살아가고 있다.
내 나이 8, 9,10세 때 똑똑히 기억하고 잊혀 지지 않는 만행들을 되짚어 보면 어릴 적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에 시골 동네를 모두 빼앗겼다. 일본 순사들은 소리 지르고 다니면서 농사 지어 놓으면 벼 공출 그것도 지게로 볏 가마를 져다 주고, 보리 공출, 목화 공출, 놋그릇 공출, 가마니 만든 것도 공출, 심지어 색시 공출(지금의 위안부 할머니들), 남자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이렇게 악랄하게 순사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얼마나 끔찍했던지 어른들께서는 어린 아이들한테 순사가 오면 얼른 알려 달라 하시면서 조심 시키고, 늘 불안하고 억울하게 사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봤던 색시 공출은 결혼 안 한 처녀만 골라서 일본으로 데려갔다. 과년한 따님을 두신 분들은 늘 불안에 떠셨다. 우리 큰 오빠의 경우도 한 예 가 될 수 있다. 장인 되시는 분께서 따님을 지키기 위해 단장 짚고 고개 길을 넘어 오시면서 혼인 좀 하자고 오셔서 연을 맺고 사셨다. 오빠는 고인이 되셨지만 아내 되시는 분은 94세 로 지금까지 생존해 계신다.

순사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머리엔 도리우찌(일본 모자) 쓰고, 국방색 양복에 총 메고, 방망이 달고 칼 차고 어느 때는 권총도 있었다. 사람들은 쩌렁대고 다니는 것 보면 몸서리 쳐진다고 했었다. 다리엔 갑반이라 하여 붕대 감듯이 발목에서 무릎 아래까지 둥둥 감고 다니는 것을 보면 어른들께서는 늘 한 숨 짓고 사셨다. 그 당시 어른들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는 순사를 보면서 어른들도 무서워 하니 아이들도 당연했다. 울다가도 저기 순사 온다 하면 그치곤 했었다.

부자는 부자라서 다 뺏기고, 없이 사는 사람도 뺏기고, 어른들은 눈물로 사셨다. 놋그릇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았던 가보나 다름없었는데 이마저 모두 빼앗겼다. 빼앗아간 놋그릇은 녹여서 탄피를 만들어 전쟁 준비하려고 공출이라 하면서 모조리 빼앗아 갔다.
 어느 가을날 밤을 주우면서 옆집 친구와 둘이서 이웃집에 순사가 왔다기에 숨어서 보니 벼 항아리 속에 놋그릇을 넣고 위에다 벼를 부어서 감쪽같았는데 쇠꼬챙이를 들고 다이며 푹푹 찔러 쇳소리가 나니 일꾼 시켜서 벼를 다 퍼내고 놋그릇을 꺼내 지게에 짊어 놓고 주인아저씨를 불러내더니 공출 안하고 숨겨놨다고 노인한테 통하지 않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며 뺨을 때리면서 무릎 꿇어 빠가야로(일본말의 비속어)하면서 손을 뒤로 묶은 채 앞세우고 순사는 뒤에서 발로 차면서 데려가더니 감옥 생활을 시켰다고 했다.

어느 날은 집 건너편 큰길을 쳐다보니 윗동네 사람들이 무엇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은 손을 뒤로하여 묶은 채 앞세우고 뒤따라가는 순사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모이기만 하면 어느 누가 잡혀 갔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이 몹쓸 세상 언제 끝나나 하면서 한탄의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하고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왜 우시냐고 하면 앞치마 끝을 잡고 눈물을 닦으시면서 얘야 곧 난리가 난다고 하니 다들 죽는다고 하더라 하시면서 이제는 피난을 갈 곳도 없다고 하시면서 계속 우셨다. 그러시면서 너 건너가서 작은 댁 식구와 오빠들도 오시라 해라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라 하셨다. 난리가 나면 못 볼까봐 다 모여서 식사 한번 하시려고 모두 부르신 것 같았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큰 솥에는 흰 밥을 한 솥 해 놓으시고 중간 솥은 쇠고기 미역국을 끝 솥에는 옥수수를 쪄 놓으셨다. 
온 식구가 마당에 밀대방석에 깔아 놓고 저녁을 먹었지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마쳤다. 다음날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 왔다 갔다 했다.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징소리가 나더니 동네사람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 소리를 크게 외치면서 그야말로 난리였다. 다음날도 농악소리 만세! 만세! 만세! 부르면서 이제는 해방이 되었다며 몇날 며칠을 즐기고 춤도 추고 울기도 하였다.

그 험악했던 일제 강점기의 압박과 설움을 이겨내며 한 많은 세월을 눈물로 사셨다. 후손들에게 이 험난했던 과거사를 들려주고 싶지만 많은 기억들은 지워지고 지금 말하기엔 현실에 맞는 것 같지도 않다. 지금 우리 아이들을 보면 윤택한 생활에 만족을 느끼면서 이런 슬픈 과거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아플 뿐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위안부 문제라든지 강제징용 등 일본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생존해 계신 분들이 얼마 남지 않아 생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사과도 받아내고 마무리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일본 총리의 막말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더 마음이 아프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우리의 후손들이 정신 차리고 잘 해결되는 그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기다릴 뿐이다. 잊지 말자 일본의 만행을 이것은 내가 겪은 실화이다.

내 나이는 어렸지만 실화로 보고 경험했다. 당시 친정아버지는 약방과 글방선생님으로 겸업하셨다. 또 성균관에서 합격해 진사 임명장과 표창도 받으셨다. 어릴 때 순사가 자주 와서  “센세이 곰방아~” 이렇게 인사를 하곤 했다. 아버지께서는 문갑 속에 태극기뭉치가 들어있어서 무섭고 두려 우셨다고 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병원 약방도 흔치 않아 순사는 자기부인이 산기가 있으면 아무리 야밤이라도 불수산을 찾으려고  약방을 찾았다.
순사가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아 우리나라 사람을 데리고 밤에 올 때면 온   동네의 개가 짖으면서 떠들썩했다. 그땐 약국을 순사가 자주 오는 것이 무서웠다. 왜냐하면 어떤 물건이든 보이면  모두 빼앗아 갔고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문갑 속에 만해 한용운과 함께 찍은 사진이 넣어 두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 뒤로 초등공민학교를 갔는데 학생들이 모두가 큰오빠 큰언니들이였다. 여자는 댕기였고 남자는 긴 머리였다. 하지만 얼마 뒤엔 모두 짧게 잘랐다. 그리고 홍성에서 학교 행사가 있으면 트럭에 대형태극기 달고 사람들이 올라타고 있었고 홍성고등학교 밴드부는 북치고 나팔 불며 거리 행렬을 했다. 그곳에 군수와 김좌진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뚱뚱하고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거리행렬 가운데로 늠름하게 걸어왔고 학생들은 길 양쪽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했다. 거리 행렬은 구항초등학교 넓은 운동장에 모여 우렁차게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 만세! 3창을 부르며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을 만끽했다.

■ 방영순 할머니는?

▲충남 홍성 구항 출생(1938년)

▲'문학세계'2009년 시인등단

▲전)보령문학회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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