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
 를 바라본다. 하얀 티셔츠에 파란 반바지를 입은 여인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를 헤치듯 혹은 받듯 하며 서 있다. 언듯 추워 보인다. 오후 서너시의 바다는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선듯하다.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해는 어디 있는지 살이 창백하다. 희디 흰 안개가 시야를 흐리고 있다. 저 여인은 저기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 나의
 사랑은 여물지 못했다. 아니 속절 없이 끝났다. 그 녀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나는 살아야 했고 수 많은 세월 그 녀를 떠나 보내는 가면을 썼다. 무명겹저고리를 그 녀와 만났던 개울 흘려 보냈고, 죽을 만큼 아프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 녀가 생각 나면 의식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꺼이 홀로 울기도 했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나를 정신 없게 나이를 먹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홀로 넋 놓고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데쟈뷰에 빠져 버린다. 그래 여물지 못해 속절 없었기에 내가 이러고 있는 거다.

■ 그 녀와
 나의 인연이 무엇이었을까? 그 녀가 나에게 던진 조약돌. 대추알. 네가 그녀에게 건네준 무 한 덩이, 호두알. 그 녀의 스웨터 앞자락에 묻은 검 붉은 진흙물. 그 녀의 무릎에 발라준 송진. 아니다. 냄새다. 수숫단 밑으로 그 녀의 앞으로 등을 밀고 들어갔을 때 난 그 비릿하고 꽃지고 흙진 냄새. 그 녀가 죽으며 가져 가려 했던 그 스웨터도 사실은 냄새였을 거다. 왜 나는 냄새를 사랑하는가? 비릿한 바다 냄새에 흙진 냄새가 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 개울은
 지금 없다. 그 자리는 메꿔져 아파트가 들어 섰고 동무들은 양아치가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아니면 그럭 저럭 사는 사람이 되어 있다. 윤초시네를 아는 사람은 그 곳에 없다. 고향이 사라졌으니 사람도 없을 밖에. 다만 바람만이 알 것이다. 소나기를 동반하는.
 내가 사는 이 곳은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러나 어릴 적 고향 보다 낫다고 생각 한다.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지금 사는 곳이 고향이라거나, 내 아이의 고향이 여기네요 한다. 여기에 초 다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꼭 외지에서 오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내 고향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니. 바람이고 냄새가 내 고향이라고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녀가 내 맘 속에 있는 한 그렇다고 할 수 밖에.

■ 소나기가
 그 날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흔들 대던 허수아비도 없을 거고, 송아지 타기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들꽃 여러 송이들이 없었을 거다. 나와 그녀의 애쓴 관계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인연이란 있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그러나 결국 그 꽃들은 비오며 서서히 꺽이고 뭉그러져 비빛 무른 땅으로 흩어져 버렸다. 현실이 되어 버렸다. 우연이 쌓여 필연이 되고 필연이 쌓여 운명이 된다 하는데 나에게 기회는 없었다. 젠장. 비가 내리나?

■ 바다
 를 바라 본다. 여인이 없다. 어디 갔지? 바람이 잔잔하고 구름은 수평선 아래로 내려 왔다. 해는 붉음이 되었고 살은 노을이 되었다. 안개는 느낌으로 남았다. 내 마음의 소나기는 이렇게 멈추었다. 그러나 또 내릴 거다. 운명은 이런 거고 이 것이 그 녀와의 인연이다. 소나기 내리는 그 순간 그 안에서 살아 있는 바람과 냄새를 사랑한다. 인생은 일생이 아니라 순간임을 믿는다. 소나기 내리는 그 순간, 찰나가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