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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실록(實錄) - 조선왕조실록속의 보령8]이몽학의 난과 보령
2015년 05월 12일 (화) 13:16:06 이후근 기자 webmaster@charmnews.co.kr

조선은 신진사대부와 신흥무장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나라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나라의 기틀을 다져갔으며, 건국초기 약 100여 년간은 세종으로 대표되는 전성기를 이룩하기도 했다. 한글창제로 대표되는 세종의 문치는 가히 세계적 수준과 비견할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서서히 체제 모순이 발현되기 시작하면서 나라는 점점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힘이 약화되어갔다. 혼란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민족의 뿌리가 흔들릴 지경에 이를 수 있는 전란을 불러온 계기가 되었고, 나라는 파탄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도리어 서인들에 의해 정권이 독점되면서 보수화의 경향이 더욱 강화되어 갔으며, ‘삼정 문란’에서 보듯이 관리들의 가렴주구도 늘어갈 뿐이었다.

특히 임진왜란은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조선왕조와 지배층의 통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일찌감치 몽진을 결정해 의주로 거처를 옮기고는 여차하면 중국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비록 명 정부에 의해 거부되어 중국 본토로의 도망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왕실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보령과 인접한 고을인 지금의 부여 홍산에서 조선왕조를 무너뜨리려 했던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이몽학의 난이다(1596년-선조 29년). 반란의 주모자인 이몽학은 정면으로 왕권을 타도하고 새 나라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몽학과 일당들은 임진왜란을 맞아 종군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민심이 이반하여 백성들의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고, 크고 작은 고을의 방비가 허술함을 보게 되었다. 그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몽학은 왕족인 전주이씨 가문의 서자로서, 무량사(지금의 부여군 외산면)에 무량사에 모여 동갑계를 만든다고 선전하여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는 이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을 따르게 했다. 무리들은 우선 홍산현을 습격해 현감 윤영현을 사로잡은 데 이어 임천군수 박진국도 사로잡았다. 이후 정산, 부여 등을 공략하여 손아귀에 넣고는 인근에서 최고 큰 고을인 홍주성으로 향했다. 홍주성은 목사 홍가신이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이몽학 무리들이 홍주성으로 향한다는 정보가 있자 홍가신은 인근 고을에 파병 요청을 했다. 보령과 남포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록에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전해진다. 선조 29년(1596년) 7월 1일, “...중략...홍주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민병(民兵)을 모으는 한편 ...중략...이때 남포현감 박동선(朴東善)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수사(水使) 최호(崔浩)에게 급히 알리고 군병을 동원하여 홍주로 나아가 홍주를 구원하자고 하니, 수사는 동선에게, 자기에게 와서 상의하라고 했다. 동선은 즉시 군병을 모아 달려가서 곧장 홍주로 진군하자고 하자, 수사 최호가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다.’ 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동선은 큰소리로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계교하는가.’ 하였다. 드디어 수영(水營)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였고 보령현감 황응성(黃應聖)을 시켜 본현(本縣)의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남포현감 박동선이 핑계를 대며 출정치 않고 있는 충청수사 최호를 책망하고 설득해 파병을 결정하게 했다는 기록이다. 홍주성은 이들 원병을 얻자 크게 사기가 오르게 됐다. 반군들은 관군인 증원군이 속속 도착하여 기세를 올리자,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 어둠을 타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반군 중 김경창 등이 이몽학의 막사로 진입하여 자고 있던 그의 목과 사지를 베어 관군에게 헌납하고는 항복했다. 그러자 반군은 일시에 흩어져 버리고 반란은 종식됐다. 우리 고장의 수령들은 난을 맞아 그 본분을 다하고자 했다. 난이 발발한 이후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한 부여현감 허수겸 같은 자와 비견될 만한 일이다. 비록 중앙 정부는 그 권위를 잃어 통치기반 마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지방 작은 고을의 수령들은 그 본분을 다했다. 아직 조선이 아주 망할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 왜적의 침입을 맞아 흔들리는 조선을 지탱해 준 것은 중앙의 왕실과 고관대작들이 아닌 중심을 잃지 않은 수령들과 백성들이었다.

<자료인용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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