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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실록(實錄) - 조선왕조실록속의 보령6]
수령(首領) 과 아전(衙前)
2015년 04월 14일 (화) 14:12:18 이후근 기자 webmaster@charmnews.co.kr

선조 40년(1607) 윤6월 28일 사헌부에서 각 지방관에 대한 감찰 결과를 보고하며 “남포 현감(藍浦縣監) 장준(張畯)은 관직을 삼가지 않아 정사를 아전에게 위임해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으니 하루라도 관에 두어 거듭 백성들에게 괴로움을 끼치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파직을 청했다.
숙종 24년(1698) 7월 17일 충청도로 파견한 암행어사가 보고서를 올려 “남포현감 윤이신(尹以莘)은 노쇠하여 일을 살피지 못한 나머지 국역에 나아가지 않고 있는 장정(壯丁)을 뒤져 찾아내는 일을 해당 아전에게 일임하고, 간악한 아전이 조세의 결손액을 메우려 관계없는 백성에게 뒤섞어 거두므로 유망(流亡)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라 생기고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라며 파직을 청했다.
두 기사 모두 조선시대 관원들의 감찰기관 이었던 사헌부와 국왕이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암행어사가 지방관이 아전에게 휘둘리어 정사를 크게 잘못 처리하였음을 지적하고 그 직을 거둘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아전(衙前), 또는 향리(鄕吏)란 조선시대 지방관아에서 지방 목민관을 보좌하며 행정실무를 담당했던 계층 또는 그 직책을 칭하는 용어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은 조세 및 공물 징수가 주요 임무인데 이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지방 행정 단위에 중앙의 6조(이·호·예·병·형·공)에 상응하는 6방의 조직을 갖추고 토착 향리들로 하여금 그 역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그 직이 세습되어 조선시대 신분 계층 중 중인층을 형성했다. 이처럼 아전은 수령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어 백성들의 삶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수령이 아전에 휘둘리어 그 감독을 소홀히 하고 그들과 결탁해 정사를 올바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포현감 윤이신의 파직을 청하는 암행어사가 “아전의 농간과 횡포가 심해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는 백성이 잇따랐다”는 보고를 올리는 대목에서 아전에 의한 폐해가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아전들에 의한 폐해의 발단은 그 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의 아전은 고려시대의 아전이라 할 수 있는 향리와는 사회경제적 위치가 매우 달랐다. 고려의 향리는 신라 말 지방사회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호족(豪族)들이 지방에 남아 있다가 983년(성종 2)에 중앙집권정책의 일환으로 12목(牧)에 지방관이 설치되면서 향리로 재편되었다. 이후 향리에 대한 통제가 계속되면서 향리는 지방관의 지시에 따라 조세와 공물의 징수와 조운(漕運), 소송(訴訟), 그리고 각 지방군의 통솔 등의 실무를 담당했다. 특히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방 조직에는 향리가 실질적인 수령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그 역에 대한 대가로 국가로부터 땅을 받거나 자신의 땅을 소유 할 수 있어 지방의 실질적인 지배계층이었다. 이들 향리계층 중 일부가 문학적 소양과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하여 관료로 진출하여 후일 조선왕조 건국의 주도세력인 신진사대부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반면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실현을 위해 향리에 대한 통제책을 실시하여 지방토호적인 성향이 짙은 향리층을 와해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조선시대의 향리는 ‘아전’이라 하여 지방관청의 실무자 또는 행정사역인으로 전락하였다. 특히 아전으로 일한 것에 대한 댓가로 지급되던 녹봉과 땅이 주어지지 않아 백성들에 대한 수탈의 주요 원인이 됐다.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조세와 각 역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주로 빈번했다. 조선의 주요한 조세정책은 삼정(三政:田政·軍政·還政)이라 하였으며, 이 과정에 아전들이 개입하여 사리사욕을 챙기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경제생활이 크게 위협받았다. 임기가 짧은 지방관은 임지(任地)의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고 그 지방의 사정에 밝은 아전들이 지방관을 속이거나 지방관과 결탁해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 짐은 물론 심한 경우 고향을 버리고 스스로 유랑민이 되는 길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조선 후기 대학자 조헌(趙憲)이 “우리나라는 이서(吏胥:아전) 때문에 망한다”고 통탄한 것은 그 폐단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자료인용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후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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