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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실록(實錄) - 조선왕조실록속의 보령]충청수영(忠淸水營)
2015년 03월 17일 (화) 15:25:37 이후근 기자 webmaster@charmnews.co.kr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보령현(縣)과 남포현(縣)의 연혁 모두에서 왜구의 내침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다. 또 충청도 서해안 지방 인근 관아의 연혁을 살펴보면 왜구와 관련된 기사가 빠짐없이 서술돼 있다. 이를 통해 왜구의 해안지방 내침이 당시 정국의 주요 현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고장에서도 고려말-조선초 보령땅에 출몰했던 왜구를 물리쳐 보령의 수호자로 알려진 도만호 김성우 장군에 대한 각종 기록들이 전해져 왜구 준동이 보령 백성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본디 왜구는 일본의 해적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적게는 수십의 도적무리에서 많게는 대규모 선단을 거느린 본격적인 해적의 모습을 하고 한반도는 물론 중국근해까지 노략질을 일삼았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내가 죽으면 호국용이 되어 왜적을 막겠으니 바다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신라 문무왕(文武王)의 기사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에서의 왜구의 침입은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으나, 이들이 더욱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여·몽 연합군이 일본원정에 실패한 고려 후기부터이다.

특히 한반도의 왕조교체기인 고려말-조선초는 왜구들의 준동이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이 시기 왜구의 준동은 고려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됐으며, 조선태조 이성계는 지리산 인근까지 출몰한 왜구를 물리친 황산전투를 통해 얻게 된 전국적인 명망을 발판삼아 왕조교체를 이룰 수 있는 정치세력을 갖춰 조선개국의 주요 원동력으로 삼기도 했다.

이들 왜구들은 곡식은 물론 사람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기는 등 만행을 일삼아 해안 지방은 물론 인근 내륙에 이르는 농어촌사회를 파괴했다. 해안지방 주요 읍성들은 백성들이 텅텅 비어 무인지경이 됐다. 나아가 왜구들은 단순한 도적에 그치지 않고 지방에서 조세(租稅)를 거두어 서울로 올라가던 조선(漕船:곡물운반선)까지 그들의 좋은 ‘먹이’로 삼았다. 국가의 중요한 통치기반 중 하나인 조운(漕運)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까지 이르게 됐던 것. 신생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왜구 퇴치를 위해 강력한 제반 정책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가 태종 때의 대마도 정벌에 이르게 됐던 것.

이와 함께 조선 정부는 정벌이라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군사행동과 함께 해안지방을 방비하는 주요한 정책들을 마련하고 시행했다. 조선은 개국초의 혼란했던 시기를 수습한 후 태종-세종조에 이르러 육군을 이르는 병영(兵營), 해군을 이르는 수영(水營)을 새로 설치하고 읍성들을 개축해 백성들을 옮겨와 살게 하는 등 강력한 해안 지방 안정화 정책들을 펼쳤다. 이에 따라 보령을 포함한 충청지방 해안방비를 위한 충청수영도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세종실록 2년(1420년) 10월 27일자 기사에는 “수군도절제사를 고쳐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라고 부르고,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설치했다”라고 기록돼 있어 이 시기 수군정비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음 알 수 있다.

충청수영 설치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편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편에는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를 파견해 해미현(海美縣)에 두고, 충청수영은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를 파견해 보령현(保寧縣) 서쪽 대회이포(帶回伊浦) 두었다’라는 기사가 있어 당시 해안과 육지를 방비하는 주요한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충청수영의 운영과 관련된 세세한 기록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충청수영에는 중대선(中大船) 6척, 중맹선(中孟船) 18척, 쾌선(快船) 4척, 군사 없는 중대선 6척, 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 6척 등을 두어 해안방비를 위한 여러 군선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충청수영 관할을 좌우로 나누어 좌도도만호(左道都萬戶)는 태안군(泰安郡)에 두고, 우도도만호(右道都萬戶)는 남포현(藍浦縣) 구정(龜井)에 두어 각각의 해안방비를 담당케 했다.

이처럼 충청수영 설치는 오로지 왜구를 방비하기 위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경상, 전라도에 비하면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했음도 실록 속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성종실록 13년(1482) 5월 28일자 기사에 충청도 수사 손계량(孫繼良)의 능력에 대해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기록 중 “충청 수영(忠淸水營)은 곧 내지(內地)이므로 긴요(緊要)한 곳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어 경상, 전라도 보다는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조 내내 정삼품 무관 벼슬이었던 수사(水使)를 경상, 전라 좌우도 각각 2인을 두었던 것에 비해 충청도에는 1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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