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여 강이여/ 네 모습 그대로 있어/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내 탯줄을 묻은 마을엔 내 어린 시절, 도랑도 흐르고, 느티나무도 서 있고, 서로 나눔의 인정도 그대로이다.
봄이면 앵두나무 가지엔 탱탱 붉은 앵두가 사랑처럼 익어가고, 가을이면 빠알간 홍시감은 전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서 넉넉함을 말해준다. 山에도 들에도 풍요로운 노래가 그칠 줄 모른다.
내가 고향(동막) 마을을 찾아가면, 내 어머니의 소싯적 이야기는 지금도 도랑 빨래터에서 화사하게 들린다. 나는 어머니를 만난 것 같아 흐뭇해진다. 내가 그 마을을 떠나 올 때면 “또 와, 이...”라고, 인정스런 인사를 동네 분들이 해 주신다. 아직은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정감 있게 대해주시니 항상 그 분들이 건강하시길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무거운 발길을 옮기곤 한다.
이렇게 사람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면 반가워서건,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건, 인사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요사이는 누구와 인사를 건너게 되면, 고향(보령시)의 시장님(李時雨)의 인사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아주 예의 바르게 ‘수직’으로 정성껏 인사를 하신다. 나는 그 분이 정치에 뜻이 있어서, 혹 선거철에만 그러려니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 분은 시정(市政)의 ‘수장’이면서도 몸을 낮추고 서민들 속에 호흡하며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에게는 배려하는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그 분은 벌써 수 십 년 동안 몸에 배인 수직의 인사였다.
대하는 이 마다 제사 모시 듯 정성을 다하니, 참으로 현명한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옛 것을 지키고 시민을 존중할 줄 안다면,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린다)의 정신이 아니랴!
십여 년 전, 서울에서 선거철이었을 때이다. 나는 저녁 찬거리를 사려고 슈퍼에 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곳 입구를 가로막고 서서 손 내밀며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는 분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맛만 보라고 손끝만 내 밀었다. 그 사람들이야 “강(江)도 없는 데 다리를 놔준다.”고 공약을 남발하는 때묻은 정치인들이 아닌가!
이제 지도자가 되려면 신뢰를 갖도록 해야 할 것이고, 또 그 무엇인가 우리 것을 지켜 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가장 우리 것이 세계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많은 지도자들은 원칙을 무시하고 대중에 영입하거나, 금전에 멍이 들어 부정을 밥먹듯 한다. 지도자에게서 그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친화력을 갖춘 지도자를 이 시대는 요구할 지도 모른다.
현명한 지도자란,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자신을 낮추며, 겸손해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교만하다면 그 아랫사람들은 그에게서 친화력마저 잃게 되고 존경심을 갖지 못하게 된다. 현명한 지도자란 그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오래 남을 수 있는 시정을 펼쳐 나가야만 하지 않을까! 문명이 발달하면서 따사로운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시대의 커다란 슬픔이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이야기다. 슬라브족이나 게르만민족은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체온이 아쉬워서 밀착하는 인사를 하고,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접근하면 불쾌하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자세를 낮추는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또 아프리카의 ‘수와히리’ 종족은 서로 엄지손가락을 번갈아 쥐는 것이 인사라고 한다.
서양사람들은 악수나 키스, 포옹으로써 인사를 한다. 이처럼 몸을 낮추지 않고 평등한 입장에서 ‘수평’으로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자세를 위 아래로 낮추는 ‘수직’인사를 한다. 절이라는 말 자체가 발을 절(跛)거나 허리를 절(折)하여 몸을 낮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이래 가장 보편화 돼 있던 인사법인 읍(揖)도 그렇다. 허리를 굽혀 오른손 왼손을 맞잡아 위 아래로 수직이동함으로써 공경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가슴까지 올리는 토읍(土揖), 입 높이까지 올리는 것을 시읍(時揖), 눈 위까지 올리는 것을 천읍(天揖)이라 하여, 공경하는 농도를 달리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절에 대한 법도가 다양한 예의지국이었다.
언젠가 바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돌 조각이 세워져 있는 곳엘 갔다. 그 곳의 산수(山水)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산은 야트막하고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하게 생겼다. 그런데 그 산을 가로막는 콘크리트 건물이 막 세워져 있었다. 그 곳에 있는 포장마차를 정리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산을 막았노라고 했다.
“너에 아름다움을 감춘 것은/ 그 시대의 어두운 지도자였음을/ 먼 훈 날/ 시인은 노래할 지어다.” 그 곳은 경치가 아름다워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도시와 똑 같다고 하면 구태여 찾아 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그대로의 포장마차가 있었다면 한 잔의 약주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인이면 어둠 내린 산 그림자 앞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별을 노래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강물이 ‘셜셜’흐르는 노랫소리를 안주 삼아서 말이다. 팔을 벌리면 강도 산도 닿을 듯이 가깝다. 관광객은 이러한 자연의 정취를 느끼고 돌아가야만 다시 찾아 올 것이 아닌가?
내 고향(大川)으로 내려갈 때였다. 기차 안에서 30대 주부들 대 여섯 명의 즐거운 비명소리를 엿들었다. 이들은 대학시절 대천 역에서 어항으로 가는 버스를 탓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때 한 친구는 멋을 내기 위해서 청바지를 찢어 입었다고 한다. 바로 그 친구가 버스에 오르자 순박한 충청도 할아버지 한 분이 배춧잎(1만원) 한 장을 그녀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단다. 한사코 반대를 했지만, 할아버진 막무가내로 그 친구에게 건너 주셨다고 하니 신세대의 무지한 멋내기를 모르는 어르신이었다.
알았다고 하면 ‘고얀 놈’이라고 혼내주었을 게다. 이들은 대천 바닷가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또 만들었으면 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었다.
올라 올 땐 대천 역에서 황혼의 아주머니들도 만났다.
아마도 이들은 친목회원이 아니면 학교친구들인 모양이다.
손에는 해산물들을 한 보따리씩 사서 들고는 “조갯국이 어쩌면 그렇게 맛있느냐”고, 저마다 맛 자랑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바지락이 커서 그런가?” 전날의 조개 맛에 흐뭇해했다.
관광객에게 보령시(保寧市) ‘大川’은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바다를 가로막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고, 깨끗하게 보전하려는 노력을 해(年)마다 날(日)마다 기우려야 할 것이다. 일일권이므로 관광객은 4계절 모두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들에게 더 좋은 써비스 정신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시정을 펼치는 지도자가 21세기의 필요한 지도자다. 한 지도자는 도심 속에 유실수(감나무)를 심고, 그 다음 지도자는 잘 가꿔나가도록 하는 지도자의 문화정신이 영원한 지도자로 남을 것이 아닌가. 옛 것을 지키는 동양인의 수직인사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산수 좋은 아름다운 내 고향을 사랑한다. 이제는 문화력이 있고, 자연이란 훌륭한 교과서를 읽을 줄 아는 지도자가 이 시대의 지도자이다.
2024.12.17 화 12:35 
webmaster@charm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