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뒷면 ‘설날’이다. 귀성 전쟁을 치루고 피곤한 몸으로 고향을 찾는 도시민들을 고향에선 반가운 모습으로 반기는 정겨운 풍경이 1년에 두 번씩 되풀이된다.
 명절은 고향을 되새겨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자신을 길러낸 고향의 논과 밭 마을길을 접하며 가족의 끈끈한 유대를 맛보는 날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 우리에게 그나마의 전통과 고향과 조상의 배려를 경험할 수 있는 날이다.
 설빔, 새 운동화, 세뱃돈, 조청, 제사음식, 복조리 등의 값진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련히 고향의 정과 함께 즐거움과 모처럼의 흐뭇함을 안겨주는 설날이다.
 어린 시절에 비해 요즘의 설은 예전처럼의 설렘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고향 길도 예전에 비해 수고를 덜하고 짧은 휴일은 설날의 여운을 느끼기엔 짧을 뿐이다. 흔히 설은 우리민족 고유의 명절이라고 일컫는다.
 한국의 명절은 보름에 한 번씩 있는 절기(節氣)와는 구분된다. 농경생활의 순환 속에서 발전한 한국의 명절은 설, 대보름, 한식, 초파일, 단오, 유두, 백중 추석, 동지 등이 있는데, 설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고 한다. 요즘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크리스마스가 상혼(商魂)과 결합해 명절처럼 여겨진다.
 설은 (음력으로)새해의 첫날로 세배와 성묘를 하고 떡국으로 만든 세찬(歲饌), 세주(歲酒)를 먹고 덕담을 일부러 건넨다. 대보름이 올 때까지 여러 가지 세시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때 음력설(舊正)과 양력설(新正) 두 개의 설을 쇤 적이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강요한 신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구정을 설로 여겼다. 1961년 박정희 정권에서 음력생활화(음력설)를 폐지하고 양력생활화(양력설)를 정착시켜 놓았다. 설(구정)은 이때부터 ‘민속의 날’로 정해 현대인의 설이 아니란 뜻으로 구정(舊正)이 되었다. 이때 ‘이중과세(二重過歲:설을 두 번 쇤다는 뜻) 금지’의 지침이 강조되어 고위공직자 위주로 신정을 쇠었지만 많은 국민들은 구정을 설로 생활화했고 많은 중소기업은 대부분 구정에 휴가를 주기도 했다. 노인층의 표심을 얻으려했던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음력설을 ‘설날‘이라고 정하였다.
 설은 현대에도 가족 친지간의 유대와 고향과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민족의 전통유산이다.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무뎌진 감성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현시대의 흐름이겠지만  잊혀 가는 전통문화를 복원해 내자는 목소리는 높은데 정작 그것을 즐기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IMF(1997년 국제금융요청사태)이후 한국의 국가 정책은 무분별한 FTA로 대비되는 ‘세계화’로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소망교회 교인으로 친분을 다진 모 여대 총장(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영어 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실천방안 공청회’에서 영어 표기법의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오렌지(orange)’의 발음과 표기법을 ‘어륀지’로 주장하여 세간의 화제와 아울러 어처구니없는 냉소를 불러일으켰다. 영어에 ‘올인’이아니라 ‘얼인(얼떨떨한 사람)’ 이다.
 필자가 농촌지역의 허름한 ‘슈퍼(구멍가게)’에 들러 ‘레종 한 갑 주세요’ 했더니 주인할아버지가 골라 보라고 하신다. 시골 구멍가게 담뱃집 주인도 모르는 담배이름이 몇 개를 빼고는 뜻도 알 수 없는 외국어 이름에다가 영문자로만 되어있다. ‘디스’가 아니도 ‘This’이다. 시대가 흡연자는 범죄자 취급을 받는 세태라 생뚱맞긴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외국에 팔리는 것도 아닌데…
 담배의 종류도 판매대에 붙여진 담배명칭을 세어보니 기억에 55가지가 넘었다

 세계화의 잘못된 현상으로 우리의 문화(언어)가 굴절된 사례가 또 있다.
 아파트 이름의 ‘영어화’이다. 옛날 아파트 이름은 단순했다. “‘현대’, ‘삼성’, ‘우성’, ‘롯데아파트’…” 그런데 요즘은 아파트이름이 길고도 복잡하다. 거기다 영어까지 넣어서 ‘타워 팰리스’, ‘미켈란 쉐르빌’, ‘하이페리온’등…. 그 이유는 시어머니가 서울에 사는 아들집을 쉽게 찾지 못하도록 며느리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최근 아파트 이름이 쉬운 이름으로 다시 바뀌고 있는데 아파트 이름이 어려워지자 시어머니가 시누이와 함께 찾아오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하늘채’, ‘어울림’, ‘사랑으로’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아파트이름이 그래서 유독 돋보인다.
 필자가 생각하는 세계화의 굴절된 사례는 기업 명칭의 영어화이다. 그것도 공기업, 국영기업에서 대표적이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 ‘krc(한국농어촌공사)’, ‘KORAIL(한국철도공사)’, ‘aT(농산물유통공사)’, 민영화가 됐지만‘KT(전 한국통신)’, ‘KT&G(전 한국담배인삼공사)’등이며 농협마저 ‘NH’이다.
 전국에 저수지마다 저수지이름의 공들인 간판이 설치되어 적절한 예산인지 의문이 있었는데, 전국의 지점망에 ‘NH’라는 간판(뿐만 아니라 모든 집기류의 이니셜을 바꾸어야한다)교체 비를 조합원을 위해 쓰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필자만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국영기업을 비롯한 공기업의 영문표기는 세계화시대에 외국사냥전문기업의 표적이 되길 스스로 자처하는 꼴이며 ‘민영화와 지분의 해외매각’이라는 수순의 프로그램이라는 의혹을 당연히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즐거운 명절 설날을 앞두고 낡고 고루한 옛것만을 지키자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 하지만 민족의 아름다운 전통과 풍습, 말과 글은 적극적으로 지키고 스스로 품격을 높여가는 것이 주인 된 자세이다.
 ‘한류’ 열풍의 세계화 바람이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국가 정책의 산물이 아니라 젊은 문화인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타산지석으로 여겨야 한다.
 이번 설날엔 민족고유의 명절에 맞게 ‘우리 것’과 ‘세계화’에 대한 가치를 진정으로 느끼는 설이었으면 한다. 가족과 고향과 포근한 어머니의 품을 느끼며 행복한 추억 쌓기를 이번 설엔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