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저기 송년회를 다닌다. 지난주엔 서울에 다녀왔고, 이번주엔 대전에 송년회를 간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은 흘러갈 것이고 지금도 흐를 터인데 시간을 잠시라도 붙잡고 싶은 것일까. 새 달력을 만나기 전에 지인들을 만나 건배를 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허허로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것만 같다. 그래서 우연히 만난 이들과도 송년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다짐한다. 새해엔 정말 새로워지자고.

시간은 인류가 만든 지혜의 산물이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세월에 금을 긋고 마디를 만들었다. 그래서 지난 과오를 조금이나마 덜어내고 기운을 내는 신년을 시작한다. 그 열기의 연장선일 것이다. 매일 바라보던 책장을 가까이에서 살펴보았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책장에는 몇 해 동안 펼쳐보지 않았던 자료들이 보였다. 한 때는 중요한 자료였으나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자료들, 결코 다시는 펼쳐보지 않을 것만 같은 자료들이 박스에 가득 채워졌다.

모닥불을 지폈다. 건조한 책장 속에서 빛깔이 바래지도록 매마르게 견뎌왔던 종이가 빠르게 재로 변했다. 불길은 따스했다. 한 장 한 장 타들어가는 종잇장이 마지막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에 만나는 모닥불은 움츠린 몸을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이른 아침 인력시장 앞에서도 그렇게 모닥불을 지피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곤 한다. 내가 아침 산책길에 만나는 그들에게도 겨울날 모닥불은 그나마 위로가 될 터이다. 모닥불의 재료가 되는 나무나 종잇장들은 한 세월 흘러간 마지막 에너지까지 사람들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사이 핸드폰에 문자가 날아왔다. 부고, 아무개 별세. 발신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것이라 발신인은 알 수 없으나 별세한 이의 이름은 친숙했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여러 가지 상념을 털어내고 발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옳았다. 친숙한 그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으나 지금은 연락한지 또한 오래된 이름이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불혹의 끝자락에서 먼 길을 떠난 것이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가슴을 때렸다.

빈소는 쓸쓸했다. 상주인 중고생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허전해지는 심사를 어찌할 수 없었다. 권력이나 명예는 고사하고 변변한 경제력 한 번 가져보지 못한 고인의 빈소에는 그 흔한 화환조차 보이지 않았다. 운명의 여신은 그에게 참으로 모질었다. 누구처럼 한량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큰 것을 바라고 논밭 팔아 사업을 해보지도 않았다. 성실한 일상인으로 한 평생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 궁핍한 생활은 마치 항상 입고 다녀야하는 일상복처럼 딱 붙어 다녔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가까운 곳의 그럴듯한 가족여행조차 기억에 없다. 하지만 변할 수 없는 나의 지인이고 벗이었다. 그와의 오랜 만남은 틀림없이 현재 내 사고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된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들뢰즈는 “이 세계는 타자 없이는 펼쳐지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과거 대상들이며, 나의 자아는 바로 타자가 나타나게 만든 한 과거의 세계에 의해 형성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타자가 가능 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한 세계”일 뿐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서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것은 내가 변하는 한 계기가 되는 것이고, 그가 누구든 만남이나 인연을 거치면 새로운 내 모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와의 만남은 곧 내 미래가 되는 것이니 소중하지 않은 만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 옆을 스쳐간 수 많은 인연들이 새로워지는 순간이다.

송년과 다짐의 기운이 가득한 이 때, 보령시청 공무원 3명이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 평생 궁핍했지만 성실하게 살았던 내 지인의 삶이 오버랩 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배우고 가르쳐온 것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길이지만, 배운대로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신의 가호가 내리는 법은 아니라는 세상인심이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방조제가 무너지는 것도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동네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파헤쳐보면 훨씬 큰 사건과 사고가 있으며 관행처럼 굳어져온 비리들이 산재하다고도 한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운용해야하는 공직자들의 처신은 예나 지금이나 서민생활의 보루다. 그들이 바르게 처신해야 시민들의 삶이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부강한 마을이 된다. 웬만한 정보는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고 소통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눈가리고 아웅하지 말자. 시민들은 모두 보고 있고 듣고 있다. 공직자로서 추운 겨울날의 작은 모닥불 노릇이라도 하고자 한다면 새해를 맞이하면서 스스로 다짐해볼 일이다. 추운날 더 춥게 떠나간 지인이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