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여행을 떠나는 계절이다. 내장산, 설악산, 계룡산 등 전국의 유명한 산들이 갑자기 불어난 손님들로 호흡이 거칠어지는 가을이다. 그런 일이 아니어도 겨울을 준비하느라 심신을 가다듬고 있을 숲 속 생물들이 화들짝 놀랄만큼 거대한 인파가 산을 찾아 떠난다. 전국 고속도로의 단골 정체구간이 국립공원 근처로 옮겨갈 정도니 가을 숲은 사람들을 흡입하는 마력을 가졌나보다.

단풍이 품은 빛깔은 예쁘다. 아니, 낯설다. 노랑색, 빨강색, 주황빛 나뭇잎이 자꾸만 초록을 밀어내면서 점령해가는 숲은 이질적이다. 식당, 주점, 터미널, 학교, 아스팔트길에 온종일 내맡겨진 우리의 눈은 원색을 만나기 어렵다. 칙칙하고 튀튀한 빛깔로 꾸며진 우리의 일상은 그래서 피곤하다. 상황이 그러하니 빨노파 원색을 뿜어내는 가을숲이 어찌아니 반가울까. 그래서 일상을 벗어난 숲은 낯설지만 고맙다. 우리에게 다가온 또 다른 휴식과 위안의 장치다.

지난주에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가 직원 300여 명과 함께 보령에 가을 야유회를 다녀갔다. 전국에 내로라하는 국립공원이 산재하거늘 그들에게는 이름도 낯설었을 성주산 휴양림을 다녀갔다. 나로서야 내가 사는 마을로 야유회를 온다는 친구가 반가울 따름이었지만 직원들의 반응이 자못 염려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휴양림은 도시인들에게 충분히 휴식을 제공했고, 성주산 정상 반대편의 무량사 김시습 이야기 까지도 함께 담고 있었다. 또 대천해수욕장과 대천항을 지나 광천 젓갈 시장까지 순례한 그들의 코스는 여행의 맛과 삶의 활력이 되기에 충분한 여행길이었다.

나도 여행을 다녀왔다. 총 2시간 코스였다. 종착지는 성주면 개화1리 마을. 동행한 사람은 아내와 아이들이 전부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회삿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하는 내 생활 때문이었다. 변변한 가을 여행을 계획하지 못한 채 오서산 억새 이야기며 내장산 단풍 이야기가 어느덧 귓전에까지 다가와 웅웅대고 있지 않은가.

일요일 아침, 나는 소위 꼼수를 부렸다. “우리 마을길 여행가자!” 영문도 잘 모른 채 여행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녀석들은 벌써 ‘여행’ 준비에 분주해졌다. 오후에도 회사에 나가 처리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오전 뿐, 어떤 여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여행이 무엇이던가. 여행 최고의 맛이란 낯선 마을에 가서 그곳 풍광을 구경하고 낯선 사람들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던가. 성주 골짜기 마을은 우리 가족들에게 그런 곳이었다. 생각해보니 승용차로도 한 번 지나가 보지 못한 마을이었다. 그런 동네를 걸어보는 일이니 우습게도 나조차 기대감이 밀려오는 것 아닌가. 

10분 남짓 달려서 도착한 마을 입구에 승용차를 주차해두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작은 계곡을 따라 좌우로 드문드문 산촌 가옥들이 보였다. 그곳도 어김없이 노란색, 분홍색 단풍이 물들면서 가을을 깊숙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집 앞에 이르니 웬 무덤이 수 십 개나 버티고 있었다. 으악, 이 얼마나 낯선 풍경이던가. 언제부턴가 우리네 생활에서 삶과 죽음은 유리되고 격리되어 모란공원이니 장례식장이니 하는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았는데, 그곳은 무덤가에 대문이 있고 탈곡한 벼가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또 어느 노부부는 겨울 땔감용으로 장작을 처마 밑 가득 마련하고 있었다. 

샛노란 감과 그만한 탱자가 나란히 매달려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고, 가시오갈피 열매가 무르익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네 한 가운데에는 수 백 년은 되었음직한 상수리나무가 한 여름 그늘과 튼실한 열매의 한 해를 마감하고 겨울을 향한 선발대가 되어있었다. 계곡 옆 밤나무는 우리를 기다린 듯 숨겨두었던 밤 몇 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만나기 어려웠던 물푸레나무 열매는 그 큰 날개를 매단 채 어딘가로 날아갈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는지 기다란 열선 꼬리를 매단 말총벌이 노란 단풍잎을 밟으며 어딘가로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다. 

마을길 옆 어떤 앞마당에서는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에 맞춰 콩타작이 이루어지고 콩자루가 불룩해지고 있었다. 10분 거리로 떠난 우리의 가을 여행은 그렇게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강화도 둘레길 등 유명한 길들을 많이 찾아가지만 옆동네 마을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만 살아가고 차창 풍경에 익숙한 우리들은 개울 건너 마을길 옆에서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속에도 가을이 있고 역사가 숨쉬고, 소망과 정열과 휴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