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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나, 너 그리고 우리 그리고 일본
권용세
2011년 03월 29일 (화) 17:26:15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2011년의 대 재앙, 지진, 그리고 해일의 무서운 기세를 보며 일본을 다시 봅니다. 뒤집힌 일본을 다시 봅니다.
 우리는 일본을 열도(列島)라고 합니다. 섬나라라며 일본을 은근히 얕본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입니다. 무엇이든 일본이면 기를 쓰고 이겨야하는 우리의 강박관념, 어디서 부터였는지 그 빌미를 찾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와 다른 점에 부러움을 느낍니다.

 이어령. 우리 시대 우리 인문학의 태두(泰斗)입니다. 그이는 우리자신을 슬픈 민족으로 빗댑니다. 연유인지 <운다>로 감정을 표현하는 우리임을 짚어 냅니다(60년대).
 그때 그이는 새가 <운다>로, 지저귄다는 느낌 모른 척 늘상 그렇게 말하는 우리라고 씁니다. 심지어 겨울 밤 찬바람에 내는 문풍지 소리를 <문풍지가 운다>고 하는 우리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울음은 소리가 클수록 더 슬픔이고 작으면 덜로 생각하는 우리였던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그 슬픔에 사설(辭說)이 들어갈 자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합니다. 그뿐인가요, 웃음엔<웃어 죽겠다>는 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웃음에 왜 죽음인지, 아마 그 웃음을 달리 표현할길이 없어서이려니 쯤으로 대충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란 생각입니다.

막무가내인 나는 있어도 너는 없고 그런 우린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은 나 혼자만의 것이고 기쁨도 나 혼자만의 사유(私有)입니다. 그래서 내 탓 보다는 네 탓이 더 횡행입니다.

나는 있지만 우리는 없는 우리를, 이웃 재앙 속 일본을 보며 새삼 느낍니다. 나 만 이면 질서도 규칙도 법도 필요할 이유 없지요. 새치기도 하나마나, 나는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까지 자연스레 혼자가 됩니다. 그런, 혼자인 너와 내가 둘러쳐진 <우리>로 들어가면 우리가 됩니다. 일본을 보면서 슬픔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 같이 겪는 그 슬픔을 나 혼자로 하지 않는 공통분모로 인식하는 그들을 봅니다. 같이 이기에 나 아닌 것에 탓하지 않는, 오롯이 받아들이는 그들을 보며 공유한 슬픔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그들에게서 우린 불현 듯 두려움까지도 느낍니다.

견뎌내는 일본, 그들의 감정억제는 우리라는 한울타리속의 나를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라는 개념, 그런 명제로 교육을 받았다는 그들의 역사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이로 차근차근 그걸 배웠나 봅니다. 몸에, 마음에, 가슴에 배었습니다. 일본의 레전드(legend), 질서의 전설(傳說)이 공유로 매뉴얼이 된 그들의 일상이 느껴집니다.

우리로 돌아갑니다. 초상집에선 사설대곡(辭說大哭)입니다. ‘이렇게 나는 슬픕니다’ 입니다. 슬픔을 나누는 정리야 본연(本然)이지만 먼 우리가 아닌 가까운 우리의 슬픔엔 눈 감아온, 못 본 척 하는 우리입니다. 그런 우릴 어떻게 설명 해야할지 궁색합니다. 그게 우리의 한 단면인 표시내기일 것으로 치부(置簿)이면 너무 억울합니다. 개똥이네가 어린 개똥이 혼자서 노부모 모시고 하루 두 끼라는데 우린 그런 데가 있는지조차 외면한지 벌써 오랩니다. 이건 표시 나지 않아서? 하면서 너도 하니 나도 의 의미 없는 쏠림에 나를 세우려는 우리 각각이 보이기도 합니다.  나만 있습니다.  안 된다는 곳에서 나 보란 듯 피우는 담배입니다. 이런 것도 붙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입니다. 왜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추임새로 화장실 벽이지! 로  생각이 튀기도 합니다.

한 우리속의 우리, 나는 너와 너는 나와 함께 해야 하는 우리의 본태(本態)입니다. 그런 우리속의 우리는 일본의 겸손과 일본인의 질서를 감동으로 봅니다. 간혹 감탄 하는 것으로, 그것만으로 마무리 합니다. 그들이 갖는 우리라는 우리는 어디쯤일까. 그런 그들의 우리는 우리가 보는 우리와 다른걸까, 얼마나 다를까, 다르긴 한걸까 자꾸 되묻는 요새(사이, 즈음)입니다. 살아 구조된 일본할머니의 ‘고맙습니다’란 구조대를 향한 인사 잊지 않는 할머니의 겸손한 배려에 우리를 비춰 봅니다.  슬픔을 견뎌내는 그 모습, 다른이에게 전이될까 밖으로 내 보이지 않으려 참는 그 모습이 슬픈 감동을 더 합니다. 쯤이면 정부를 힐책하는 데모나 시위가 끊이지 않았을 우리가 떠올려지는 크게 다름도 봅니다. 경황중의 그들의 의연함, 돋아 보입니다.

나는 있고 우리는 없는, 나만 있고 우린 없는 우리, 그속에서 자란 우린 우릴 모릅니다. 우리 보다는 국민을 앞세움이 만능인 우리는 오직 큰 우리만을 선호합니다. 작은 우리는 없습니다. 거창함은 있어도 조금 작음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드름입니다.

내 얘기는 있어도 남의 얘기는 없습니다.  남의 얘기는 있어도 내 얘기는 없습니다. 네 얘기 내 사정 다 있는데 우리 얘기, 우리 사정이 없습니다. 단수는 엄연한데 복수(複數)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사유(私有)는 있어도 공유(共有)는 없고 공유(公有)만 있는 나, 너 그리고 우리를 봅니다.  일본, 그들의 감정절제, 더 큰 감동으로 와 닿는 어쩔수 없음입니다.  나 혼자만의 슬픔인 듯 몸부림치며 내 뱉는 사설에 유리(遊離)되는 우리를 맞춰 봅니다.  지금 어쩌지 못하는지 않는지 지만 그래도 우선, 가까운 우리이웃을 어쩔 수 있을 희망으로 내일을 꿔 옵니다.  

(thewalnu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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