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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게 전해야 할 억울한 죽음-보령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광복 65주년 특별기획]한국전쟁 발발직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후 집단살해
2010년 08월 10일 (화) 17:00:54 이상우 기자 editor@charmnews.co.kr
   
보령 보도연맹원들이 집단 살해되고,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짚은골' 입구(왼쪽). 하지만, 안내 표지판은 이곳에서 50m 위쪽에 세워져 있어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1945년 8월 15일 수요일(음력 7월 8일), 일제 35년간의 압제로부터 해방이 찾아왔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맞이한 갑작스런 해방은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기대와 함께 민족분단이라는 비극의 씨앗도 함께 던져 놓았다. 불행하게도 이 비극의 씨앗은 5년 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으로 싹을 틔운 후 해방 6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던 시기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좌익-우익이라는 이념의 차이가 해방이후 극한 대립양상을 보이면서 우리 민족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됐다.

해방이후 미국과 일본을 배후로 하는 자본주의 세력과 소련과 중국을 배후로 하는 사회주의 세력이 한반도의 반쪽을 각각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우리 민족을 두동강 내고 만 것이다.

각각의 배후세력에 기대 절반의 권력이라도 차지하고자 했던 위정자들은 이른바 이념과 사상을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지만, 좌-우의 구분이 그다지 중요하지도,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이 땅의 민초들이 이로 인해 겪어야 할 고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음력 5월 10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역을 휩쓸며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를 남겼다. 전쟁에 직접 동원된 남북한의 군인,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 중공군은 물론 전쟁과 직접 관계가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의 생명도 무참히 앗아갔다.

전쟁의 당사자인 군인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의 죽음은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도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다.

민간인에 대한 생명침해에는 UN군 작전과정에서의 학살, 인민군에 의한 학살, 전술적 폭격 또는 오폭에 의한 학살, 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 좌.우 이념대립에 따른 민간 조직에 의한 학살 등 학살의 주체와 방법도 다양했고,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사정도 여러 가지였다. 한국전쟁 동안 최소한 10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한국전쟁 직후 발생한 이른바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숱한 논란 속에 최근에야 정부기관에 의해 공식 확인됐다. 사실 이 사건은 4.19 혁명이후 진실이 규명될 기회가 있었으나, 이어진 5.16 군사쿠데타 주도 세력에 의해 좌절을 겪어야 했다. 좌-우 이념의 대결구도가 존재하는 한 이와 관련한 진실을 밝혀내기가 매우 어렵다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후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를 위해 여.야의 합의에 따라 기본법이 제정되고 위원회가 꾸려지는 등 본격적인 진실규명 활동에 다시 나서게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9년 1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보령지역 희생자 3명을 포함한 충남서부지역 보도연맹원 74명 학살사건을 공식 확인했다.

보령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선 지난 2005년 발간된 ‘보령문화 14집’(보령문화연구회)에서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하여’(이선행)라는 보고서를 통해 보령지역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을 최초로 공개한 바 있다. 이 보고서는 이후 진실위원회의 진상규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보령신문>은 1950년 7월경 발생한 ‘보령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해 현재까지 공식확인됐거나 발표된 내용들을 모아 요약 게재한다.

60년이 흐른 지금, 다시 과거의 아픈 상처를 들추는 것에 대해 마뜩잖은 반응을 보인 분들도 있지만,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관련자료를 모았다.

이 글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를 중심으로 ‘보령문화 14집’에 게재된 내용을 주로 참고했음을 밝혀둔다./편집자 주

- 국민보도연맹이란
 
UN의 지원 아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은 남한 내 좌익세력을 통제하고 장악할 법적.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 제정과 함께 좌익에 대한 전국적 관리.통제조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게 된다.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운영은 철저하게 정부가 주도했으며, 그 핵심으로는 당시 내무부장관(김효석), 법무부장관(권승렬), 국방부장관(신성모), 검찰총장(김익진) 등으로 검찰과 경찰의 주요 인사등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1949년 10월 19일 미군정 법령 제55호에 의해 남로당을 포함한 133개 좌익계열 정당.사회단체의 등록이 취소되고, 이들 정당이나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던 좌익인사들을 대상으로 자수와 전향을 독려하였으며, 자수기간 중 자수한 사람들에게는 처벌면제와 직업 알선 등의 신분보장이 약속되기도 했다. 반면 자수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엄벌하겠다는 등으로 보도연맹 가입을 독려했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 등에서 실적 경쟁이 벌어지면서 무리하게 숫자를 늘리는 과정에서 좌익활동과 무관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기도 했다. 1960년 국회 진상조사에서는 임의로 도장을 찍어 보도연맹원 수를 맞춘 사례나 비료나 식량배급 등을 미끼로 보도연맹 가입을 독려한 사례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따라서, 보도연맹 가입자 중에는 철저한 좌익사상을 가졌다가 전향한 사람도 있었고, 전향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살아 남기 위한 위장 전향인 경우도 많았다. 또, 좌익활동을 했지만 활동이 아주 경미하거나 좌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입하거나 협조한 사람도 있었고, 아예 좌익활동과 무관한 사람도 다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보도연맹 충남도연맹의 조직 구성

보도연맹은 1949년 10월 25일부터 11월 30일까지 세차례에 걸쳐 남로당원 자수기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작업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충남지방의 검.경 당국에서도 중앙과는 별개로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한달간 자수주간을 설치하고, 자수 전향을 독려했다.(충청매일, 1949.11.3)

당시의 신문광고에는 이들의 탈당성명서가 줄을 이어 게재됐으며, 충청지방의 검.경 당국이 정한 자수주간이 끝나갈 무렵 충남도 전체 자수.전향자는 3,902명이었으며, 보령은 128명이었다. 또한, 막바지로 갈수록 급격히 자수.전향자가 늘어난 것으로 보아 검.경의 자수독려가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남도 보도연맹 결성일은 1949년 12월 27일이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전검찰청 회의실에서 열린 결성식은 고문 권영옥.이영진.송호성, 지도위원장 정재환, 지도위원 윤준영.서광순, 참사 김진권 외 30명, 그 밖에 이사회 소속으로 명예 이사장 이영진 등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하오 2시 반부터 4시까지 거행됐다. 간사장에 강창우, 사무국장에 조강희를 임명했다.

동방신문 보도에 따르면, 1950년 1월 16일 대전지검 홍성지청에서는 지청 관할 하에 있는 홍성군, 보령군, 서천군의 보도연맹 지방지부 결성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모임을 갖는다. 보령은 1월 26일을 결성일로 정한다.

보령군 연맹은 1월 26일 오전 보령경찰서 무도장에서 자수자 162명의 참석 하에 개최됐다.(동방신문 1950. 2.1) 이날 참석자의 한 사람으로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장 성세호를 거론하고 있으나, 성세호는 1948년 4월 1일부터 1950년 6월 12일까지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장을 역임했다. 따라서, 당시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장은 성세호가 아니라 김영환이었다. 그러므로 이날 결성식에는 홍성지청장 성세호를 비롯해 보령경찰서장 김선호, 보령경찰서 사찰주임 이정순 등이 참석했다. 이날 피선된 임원은 위원장 성세호, 명예이사장 송인호, 이사장 김선호, 간사장 김태연 등이다.

- 예비검속

보령에서 예비검속은 1950년 6월 25일에서 7월 13일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령의 각 지역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은 1차로 각 지서를 거쳐 보령시 대천동 소재 농협창고에 구금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산면과 같이 보령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해당 지서에서 구금을 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령에서 경찰이 후퇴한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7월 13일 오후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보령경찰서 연혁사’에는 ‘4283년 7월 14일에 중과부적으로 작전상 부득이 후퇴....’라고 기록돼 경찰의 후퇴일이 1950년 7월 14일 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경찰관으로 근무하였던 이○○의 진술과 ‘홍성경찰서 연혁사’ 등에 의하면 보령에서 경찰이 후퇴한 시점은 1950년 7월 13일 오후일 가능성이 높다.

- 희생상황

보령지역에서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보령시 대천동 소재 대천농협 창고에 수용되어 있다가 1950년 7월 10일을 전후하여 이어니재로 끌려가 집단 살해됐다. 살해 현장 인근에 거주하는 남포면 옥서리 사현마을 주민들은 전쟁 소식이 들리던 어느 날 갑자기 총소리를 연속으로 들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이 들어온 줄 알고 인근 산으로 피난을 갔으며, 이틀 정도 지난 후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음을 알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때 마을주민들은 이어니재 부근에서 손이 묶인 채 총 맞아 죽은 민간인의 시신이 널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옥서 2리에 사는 김○○씨는 “이어니재에서 전쟁 당시 이쪽 저쪽 합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개울물이 다 빨갰을 정도였다. 마을 어른들은 버려져 있는 시신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쇠스랑의 가운데를 부러트린 다음 양쪽 끝에다 시신의 목을 걸고 끄집어 내기도 했다. 수습한 시신들을 여기 저기 묻어 놓았는데, 일부는 유족들이 와서 찾아가고 일부는 방치됐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황○○씨는 전쟁 당시 주산면 면장이었던 임○○씨를 면담한 적이 있는데, 임씨는 1950년 7월 10일경에 주산면 주민 20여명이 총격 사살 당하는 현장에 면장으로서 참관하였다고 한다.

임씨는 황씨와의 면담에서 ‘살상당한 주민은 대부분 보도연맹원으로 주산지서에 얼마간 감금했다가 데리고 가서 사살하였으며, 살상 현장은 보령군 남포면 옥서리에 있는 이어니재였다. 총격 살상의 집행은 경찰(주산지서 소속이었는지는 불명)이 맡았으며, 현장에 참여한 경찰도 괴로웠는지 전부 술을 먹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임씨의 증언은 면 단위 혹은 지서 단위로 살상행위가 있던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그 이유는 지리적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주산지서는 보령경찰서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령경찰서로 가기 위해서는 살상현장인 어어니재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령지역에서 경찰의 후퇴가 7월 13일경이었다고 할 때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된 날짜는 대략 7월 10일에서 7월 13일 사이라고 추정된다.

보령지역에서 보도연맹원 희생자로 공식 인정된 3명 중 이어니재에서 시신이 수습된 사람은 이○○이며 나머지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 희생현장

보령지역의 희생현장은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에 있는 이어니재다. 이어니재는 남포면 옥서리와 웅천읍 두룡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이며, 21번 국도와 장항선 철도가 여기를 지난다. 현재의 21호 국도가 생기기 전에도 비포장이긴 했지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있었다.

고개 밑에서부터 산마루까지 비교적 깊고 울창한 계곡이 몇 개씩 형성되어 있으며, 이 지역에서는 ‘알미골’과 ‘짚은골’ 등으로 부른다. 산마루 근처에는 한국전쟁 중 주산전투에서 순직한 철도경찰 16인의 합동 묘지와 위령탑으로 이뤄진 추모공원이 있다.

주산전투는 1950년 7월 15일 철도경찰대와 인민군이 주산지서에서 조우하여 치룬 전투로 이 전투에서 인민군에 포로로 잡힌 10명의 철도경찰은 웅천지서에 감금되었다가 7월 27일 오후 2시 이어니재에서 사살 당했다. 사살 장소로 굳이 이곳을 택한 것은 경찰이 후퇴하기 전에 이어니재에서 보도연맹원을 사살한 것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강하다.

경찰 후퇴시 보도연맹원 등을 살해하지 않은 천안의 경우는 인민군 점령기에 우익에 대한 보복학살도 거의 없었다고 하는 참전 경찰관의 진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주요 증언

박○○(42년생, 희생자 박○○의 아들): 소설가 이○○의 형님 이○○가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이 사람이 남로당이 좋다고 선전했고, 부 박○○도 그 영향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였음. 50년 7월 9일경 모내기 중에 연행됐으며, 마을에서 희생당한 사람은 박○○, 서○○, 염○○, 백○○, 백○○, 곽○○ 등임.

최○○(46년생, 희생자 최○○의 아들): 부 최○○는 전쟁 발발 며칠 후 경찰 두명이 와서 연행해 갔으며, 마을의 최○○씨 부친도 함께 희생됨.

이○○(46년생, 희생자 이○○의 아들): 부 이○○은 보령군 남로당 총책 이○○의 영향으로 보도연맹도 가입했음. 조모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부친이 보령경찰서에서 실려 나갈 때 트럭 3대가 나갔다고 하며, 보도연맹 희생자는 마을에서 부친이 유일함.(이어니재에서 시신 수습)

이○○(56.천북면): 참고인은 신청기간 경과 후에 위원회에 전화로 접수한 자로 부친 이○○이 보도연맹으로 희생당했다 함.

이○○(61.천북면): 시아버지 이○○가 보도연맹으로 희생당했다고 하며 같은 마을의 김○○에 의하면, 이○○는 보도연맹 천북면 면단위 책임자였음.

조모(84. 보령경찰서 순경): 1차 방문후, 전화조사, 조사관의 방문에 극도의 경계를 드러냈으며, 보도연맹 관련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함.

서모(81. 보령경찰서 순경): 전화조사, 보령의 보도연맹원 수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략 30여명 정도 될 것이라고 하며, 당시 경찰의 복무규율은 상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함.

박○○(79): 전쟁때 21살이었음. 전쟁 때 보령군 미산면 평라리에서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사람은 서○○, 박○○, 염○○, 백○○, 백○○, 곽○○준 등 6명임.

김○○(80): 마을에서 사상이 다르다고 하여 잡혀간 사람은 최○○와 최○○(최○○의 당숙) 두 사람이며, 둘 다 시신은 못 찾았으며, 이어니재에서 희생됐다는 소리를 들었음.

이○○(74): 이웃에 살던 김○○가 생전에 이○○의 부인과 함께 보령 이어니재에서 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음.

윤○○(61): 부 윤○○(25년생)의 큰 아버지가 보도연맹이었는데, 큰 아버지를 말리기 위해 따라 다니다가 경찰에게 연행됐다 하며 그 후는 행불임.

윤○○(63): 미산면 평라리, 마을에서 보도연맹으로 사망한 사람은 7명 정도이며, 박○○, 서○○, 백○○, 백○○, 백○○, 곽○○, 염○○ 등임. 백○○과 백○○은 형제인데 형 백○○은 보도연맹으로 잡혀간 동생을 찾으러 갔다가 같이 잡혀간 경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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