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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수호신 도만호 김성우 장군
[특집]역사 속 보령인물- 불사이군의 마지막 고려 충신
2009년 06월 30일 (화) 08:12:58 보령신문 webmaster@charmnews.co.kr
   
청라면 라원리에 소재한 김성우 장군의 묘.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자 오늘의 보령을 있게 한 말하자면 보령시민들의 가슴 속에 보령의 수호신으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바로 전라우도 도만호 겸 초토 영전사 김성우(金成雨) 장군이다. 도만호 김성우 장군은 왜구의 침구로부터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보령을 지켜내고 백성들을 구해낸 보령의 수호신이다.

도만호 김성우 장군 - '왕명토왜(王命討倭)'

도만호 김성우 장군은 충숙왕 14년(1327) 판도판서 김윤장의 아들로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김성우 장군의 조부는 문무백관의 수장이었던 시중공 김류이며, 증조부는 고려 원종 때 문과장원으로 명성을 날렸던 대장군이자 문숙공의 시호를 받은 김주정이다. 이처럼 김성우 장군의 가계는 보령과는 전혀 무관한 개성에 뿌리를 둔 고려의 대표적인 토족이었다.

김성우 장군은 충혜왕 4년(1345) 약관 18세의 나이에 절충장군에 제수되었고, 충정왕 2년(1350) 도만호 겸 전라충청 양호 초토사에 임명되어 서해안 방어를 책임지는 사령관이 되었다.

특히 경인년(1350년)을 기점으로 1390년까지 약 40여 년 간 왜구의 침구는 최고조에 달했으며,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전역에서는 왜구의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왜구의 침구(侵寇)가 극성을 부리자 우왕은 1380년 김성우 장군에게 전라우도 도만호 겸 초토사를 다시 제수하여 보령 및 서해안 지역에 출몰하여 약탈과 방화를 일삼던 왜구를 토벌하라는 왕명(王命討倭)을 내린다.

이렇게 해서 전혀 연고가 없던 보령에 내려온 김성우 장군은 1380년 현재의 대천어항인 ‘군입리’와 청라면 ‘의평리’ 등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보령대첩을 통하여 이 지역에 출몰한 왜구를 완전히 축출하여 섬멸하는 쾌거를 올렸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마지막 고려 충신

보령 및 서해안 내포지역에서의 왜구 토벌이란 왕명을 완수한 김성우 장군은 1392년 고향인 개성을 향하여 마침내 개선장도에 올랐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는 소식과 더불어 이성계로부터 수차례의 신 정권 참여요청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김성우 장군은 이성계의 청을 거절하고 ‘불사이군’의 충절로 청라면 스무티 고개에서 자진순국의 길을 택함으로써 고려왕조에 대한 마지막 충성을 다했다. 이러한 김성우 장군의 행적은 유호근의 『사가집』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얼마 후에 조선 태조는 혁명을 일으켰다. 평소부터 공의 용맹을 꺼려하여 여러 번 부르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공은 어쩔 수 없이 말을 타고 칼을 차고 떠나서 스무재(甘峙)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집에서 두어 마장 거리에 있는 곳이다. 공은 비장한 마음으로 말에서 내려서 말에게 이르기를 “나와 네가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이냐?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구나!”하였더니 말도 눈물을 흘리며 땅을 발로 후비적거렸다. 공은 마침내 칼을 뽑아 말을 베고 공도 자결하였다. 말은 그 길옆에 묻고 공은 살던 곳인 감암 뒷산에 안장 하였다..."

갑작스런 김성우 장군의 자진 순국은 왜구 토벌 당시 상호군으로 함께 보령에 내려온 장남 김남호에게 망국부순(亡國父殉)의 진지인 이곳 보령시 청라면에 정착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김성우 장군의 자진 순국 이후 장남인 김남호 및 그 후손들이 대대손손 보령시 청라면에 세거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김성우 장군은 두 아들을 두었다. 차자인 김남염의 후손은 아직도 황해도 장연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지금 현재 김성우 장군의 묘가 있는 보령시 청라면 발산 장군동에 김성우 장군의 부친인 김윤장과 차자인 김남염의 제단이 설치되어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와 같은 김성우 장군의 가계는 ‘진포구 대첩’의 나세 장군의 경우와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세 장군의 고향 또한 황해도 연안이며, 나세 장군의 제단과 그 후손들인 ‘나주나씨 연안군파’의 집성촌이 바로 충남 서천군 마서면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만호 김성우 장군은 풍전등화와 같던 고려 말의 정치상황에서 오로지 국가와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했던 참 군인이었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왜구의 침구로부터 백성과 나라를 지키고자했던 위대한 고려의 장군이었다. 특히 김성우 장군은 보령 및 서해안 방위 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병사들의 식량조달을 위하여 군둔전(軍屯田) 설치하여 자급자족함으로써 40여년에 걸친 왜구의 침구로부터 서해안 지역을 중앙정부의 군수의 조달 없이 지켜낼 수 있었다.

또한 김성우 장군은 왜구와의 전투에 필요한 군의 장비(裝備)를 창터, 불무골 등에서 직접 제조하여 자급하였다. 물론 군마를 목축하고 기병을 조련하여 보령지역이 해안과 인접하고 있는 특성 상 속전속결의 전투를 유도함으로써 오랜 항해로 지친 왜군을 대파하여 섬멸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성우 장군은 생포한 왜구는 군노(軍奴)로 노역에 충당하여 부족한 노동력으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김성우 장군의 뛰어난 전략은 왜구의 침구로부터 보령 땅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고 시민들은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김성우 장군이 보령의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이것은 현존하는 많은 사료(史料) 및 보령의 많은 지명 등이 김성우 장군의 보령대첩을 고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서’에 등장하는 보령 최초의 인물

김성우 장군이 보령의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보령지역을 기술하고 있는 현존하는 보령 최초의 지리서인 『신안현지(新安縣誌)』(1412-1425)를 비롯하여 그 속편이자 『신안현지』의 제4판으로 추정되는 1748년 우부승지 정권(鄭權)이 편찬한 『신안읍지(新安邑誌)』에서이다.

이 책 ‘인물’편의 첫머리에 김성우 장군이 고려 개성 출신이며, ‘왜구를 토벌하라는 명’(王命討倭)을 받고 보령에 내려왔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있다. 아울러 왜구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보령지역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인 청라 ‘의평리’라는 지명을 비롯하여 ‘관암’ 등의 유래와 청라면에 김성우 장군의 후손들이 거주하게 된 연유 등이 또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사람들이 보령 땅의 주인이 바로 김성우 장군이라 부른다”(人謂玆土之主人)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신안읍지』는 김성우 장군이 보령 땅에 오게 된 배경과 목적에 이어 보령 땅의 주인이자 수호신임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이후 최고의 지리지로 평가받고 있는『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를 비롯하여 『조선환여승람』(1910) 등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행적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특히 『여지도서』에는 “세상 사람들이 이 땅(보령)의 주인이 바로 김성우 장군이라 말한다”(世人以爲玆土之主人)고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이전의 기술에서처럼 단순한 ”사람들“(人)이 아닌 “세상 사람들”(世人)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또한 중종 때의 성리학자로 훗날 퇴계 이황의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회재 이언적(1491-1553)과 병자호란 때의 명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쓴 김극성의 『우정집』을 비롯하여 항일 운동가이자 보령의 유학자였던 유호근의 『사가집』 등의 문집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예조판서 및 대제학을 지낸 월사 이정구(1564-1635)가 지은 김극성의 ‘신도비’를 비롯하여, ‘김성우 장군 묘비’,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명재 윤증(1629-1724) 등이 지은 비문에서도 김성우 장군의 왜구와의 보령대첩이 상세하게 고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김성우 장군의 보령대첩을 기리는 많은 전첩사적비, 즉 ‘도만호 김성우 장군 관암사적비(보령시 대천해수욕장 신광장)’, ‘전첩사적비(대천 어항입구)’, ‘진수비’(보령시 주포면 주교리), ‘왜구소탕비’(김성우 장군묘역), ‘의마암갈비’(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스무티 고개), ‘월암부비’(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김성우 장군 백마총‘(보령시 청라면 백현리) 등이 보령시 및 유관기관의 협찬과 고증을 거쳐 김성우 장군의 왜구와의 대첩이 있었던 보령 곳곳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김성우 장군의 왜구와의 보령대첩과 관련된 많은 지명들, 예컨대, ‘관암, 군입리, 상주막, 해망산, 옥마산, 불무골, 창터, 의평리. 월암, 장군봉, 은선동’ 등이 현재 보령시 청라면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산재하고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 지명이 김성우 장군의 왜구대첩에서 기인하며, 이러한 지명에 관한 유래가 김성우 장군 사후 616 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령시민들에게 여전히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왜구의 침구로부터 보령을 지켜낸 보령의 영원한 수호신 김성우 장군

   
이처럼 김성우 장군은 전설속의 허구의 인물이 아닌 고려 말에 실존했던 개성 출신의 고려의 장군으로 왜구의 침탈로부터 보령 땅과 보령사람들을 지켜낸 보령의 영원한 수호신이자 위대한 장군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성우 장군의 위대한 ‘충절’와 ‘보령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11월 1일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발산(일명 ‘고려향(高麗鄕)’) 소재의 도만호 김성우 장군묘역에서 는 ‘도만호 김성우 장군 추모제’가 엄숙하게 열리고 있다.

대천문화원이 주관하고 보령시가 후원하는 이날의 추모제는 은은한 조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지역 향토사단 현역 군인들의 조포의 발사로 시작된다. 김성우 장군 추모제는 군․관․민이 하나가 되는 보령시 차원의 추모행사로 보령시장 및 대천문화원장을 비롯하여 향토지역사단인 38연대장, 보령시의회 및 충청남도의회 의원, 무공수훈자회, 보령의 유림 및 내외귀빈 그리고 시민들이 참석하여 김성우 장군의 위대했던 조국애와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

(이 글은 김영모 박사의 2010년 출간예정인 『보령의 수호신 도만호 김성우 장군 연구』에서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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