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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에 매진한 독립투사
[역사 속 보령인물] 류준근(1860~1920)
2009년 05월 26일 (화) 08:53:34 김종윤 기자 jjong@hanmail.net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에 위치한 류준근 열사의 묘.
류준근 (1860~1920) 본관은 전주, 자는 순경, 호는 벽서.우록

[사진]
[설명]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에 위치한 류준근 열사의 묘.

항일운동에 매진한 독립투사 류준근

철종 11년 내항동에서 태어났으며 진사 형중의 아들로 최익현의 문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납세를 거부하고 을사오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박해 투옥되기도 했다. 1906년 5월 전 참판 민종식이 홍산지치에서 거의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홍주성을 함락한 뒤 유병장과 참모에 임명됐다. 5월말 홍주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남규진 등 8인의 동지와 함께 대마도로 유배됐다. 그 후 최익현이 유배되어오자 척사사상을 논하고 우국시로 화답했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백관형 등 10여명과 함께 상경해 순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던 중 일본 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에 유림대표 137인 중 1인으로 서명했으며, 일반 유림인사의 안이한 수사선도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독립투쟁 전개를 역설했다.

문집 ‘마도일기’는 홍주의진의 활약과 대마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일기체로 서술한 것으로 의병운동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청소면 신송리에 독립투사 류준근 선생의 묘가 있다.

장군감으로 불리던 어린 시절

지금의 내항동(녹문)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정의감이 강해 장군감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13세에 할아버지의 상사를 당해 병중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강의를 집행하는데 예의에 어김이 없었다고 전해지며 다음해 또 다시 아버지의 상사를 당한 후 가세가 점점 기울어지자 선생은 할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나무를 해다가 도박장을 드나들 뿐 아니라 백형 앞에서도 장죽을 물고 다니는 등 동작이 무례했지만 이를 본 어머니 김씨의 간곡한 교훈이 있은 후 행동이 점차 개준 됐다고 한다. 호남지방을 여행할 때 산중에서 10여명의 도적떼를 만났는데 도적들이 포박을 하려고 하자 맨손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포박된 행인들을 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나라가 망했는데 누구를 위해 세금을 내라는 것이냐?”

을사조약이 있은 후 현리들이 나와 세금을 독촉하자 그는 대노해 “세금은 제 나라를 위하여 내는 것인데 나라가 망한 오늘날 누구를 위해 세금을 내라는 것이냐”하고 현리를 꾸짖고 나뭇가지에 매달아 매질을 한 다음 돌려보냈다. 현에서 이 사실을 알고 선생을 잡아다 문초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나라가 망했는데 누구를 위하여 세금을 내라는 것이냐 나라를 찾은 다음에 그 동안 밀린 세금을 다 낼 것이다”라고 하자 현에서는 선생을 투옥했다.

하지만 옥중에서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6일간 단식하니 옥리들이 놀라 이 사실을 고하고 “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니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면 어찌하리이까”하고 현감에게 보고하니 현감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석방했다고 한다.

민종식이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포에 다다를 때까지 선생이 보이지 않자 즉시 격서를 보냈으며 격서를 받은 선생은 병석에서 일어나 의병들의 뒤를 따라갔다. 당시 왜병 몇이 길을 막고 고종의 특명이라 하면서 의병대장을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누구도 가기를 꺼려했다. 그러자 선생은 "적과 만나는 것도 겁이 난다면 어떻게 적과 싸우겠느냐"며 단신으로 적을 만나러 달려갔다. 왜병이 칼을 빼어들고 의병을 해산하라고 위협하자 선생은 이를 일축하고 행군을 재촉했다.

홍주성이 함락되고, 적병이 조수같이 밀려들자 민종식 등 몇몇 의병들은 성을 넘어 피신했지만 선생은 재빨리 본부로 달려가 의병의 명부를 소각했다. 그리고 탄환이 빗발치듯 날아오는데도 의관을 정제한 채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단좌한 상태로 적병에게 사로잡혔다. 왜병이 일차 문초에서 무슨 이유로 의병을 일으켰느냐고 묻자 선생은 책상을 치며 “우리는 우리나라의 국적을 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는데 너희가 무슨 상관이 있어 죄 없는 사람들을 살육하고 또 나를 괴롭히느냐”고 큰 소리를 치니 왜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생을 투옥시켰다.

왜군도 경탄한 강직함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고초를 당할 때 선생은 "우리들은 강약이 부동하여 잡혔으나 의로써 거병했던 것이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일본 음식을 받아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단식해 의병들의 구국 항일의 기개를 그대로 드러냈다. 특히 선생의 성품이 강직해 적들이 꺼려했으므로 남규진.이식.신현두와 함께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들이 대마도로 유배된 지 한 달여 후에 태인·순창에서 의거하다가 체포된 면암 최익현과 돈헌 안병찬이 유배돼왔다. 이곳에서 서로 의지하며 시를 지어 위로했는데 선생은 면암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로써 화답했다.

"고국에선 아무도 이 길 와 본 일이 없으니 일변 기쁘고 일변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네 다 함께 대의를 붙들기 위해 조용히 나갔던 것이니 깊은 수치 쾌히 푸른 바다 소리에 씻어나 보세" 이들은 대마도에서도 우리 고유의 복색을 변치 말 것을 약속하고, 일본인이 제공하는 음식과 의복을 거절하고 고국에 부탁해 해결하고자 했다.

1919년 3·1독립선언과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백관형·송주헌 등 10여명과 함께 서울 수창동 여관에 모여 융희황제를 복위시켜 민심을 수렴하고 독립을 성취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33인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자 유림대표들도 파리강화회의에 서한을 보내자는 운동에 참여해 서명한 137인중 1인이 되었다.

이듬해인 1920년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콜레라에 걸려 8월 5일 60세의 나이로 다난했던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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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09-05-27 11:45:38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보령신문> 8호에 게재된 역사 속 보령인물-8, '항일운동에 매진한 독립투사 류준근' 내용 중 류준근 선생의 호가 우륵으로 잘못 기재된 것을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즉시 수정하였으며, 앞으로도 이같은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인식
2009-05-27 10:48:00
정정을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항상 보령신문의 역사속 보령인물 을 잘 보고 있습니다.
이번글에 류준근 선생 의 호가 오자가 된것 같네요.

( 우륵 ☞ 우록(友鹿))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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