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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좌-우를 아우른 거목
[역사 속 보령인물]관촌수필의 이문구(1941~2003)
2009년 05월 12일 (화) 09:57:10 김종윤 기자 jjong@hanmail.net
   
명천(鳴川) 이문구 선생.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고 화장해 관촌에 뿌려줄 것이며, 내 이름을 건 어떤 기념사업도 펼치지 말라."


대천에서 출생했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6년 ‘현대문학’에 소설이 추천 완료되면서 문단에 나왔고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의 편집장을 지냈다. 원래 명쾌한 문장으로 사회 풍자소설에 능했는데 1970년대 초부터 토속어를 짙게 쓰면서 농촌사회의 현실을 주로 그렸다.

주요 작품에 ‘우리 동네’, ‘관촌수필’ 등이 있으며, 저서로 창작집 ‘해벽’, 장편소설 ‘장한몽’ 등이 있다. 2000년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고 화장해 관촌에 뿌려줄 것이며, 내 이름을 건 어떤 기념사업도 펼치지 말라" 위암으로 꺼져 가는 마지막 숨결을 붙잡고 남긴 유언이다. 정부에서는 한국문학의 전통과 위상을 깊게 하고 한 단계 끌어올린 공을 인정해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문학 3대 단체는 합동으로 문인장을 치러 명천을 기렸다. 그리고 유언대로 화장해 관촌 솔밭에 뿌렸다.

명천의 유언이 전해진 직후부터 문단에서는 그의 문학과 삶은 공적인 것이므로 그 기념사업은 선후배들의 몫이라는 데 합의해갔다. 무엇보다 문인들의 뒷바라지와 기념사업에 몸 바쳤던 그가 자신의 이름으론 어느 것도 남기지말라 했듯 그는 무욕으로 살아왔고 죽어 그렇게 신화했기에 더욱 기려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2005년, 그의 2주기를 맞아 문인과 사회 각계 인사 100여명이 '명천 이문구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발기문은 "명천은 이 나라 문학을 위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 몸 바치다 갔다" 며 "그 고결한 문학과 올곧은 삶을 그대로 흘려보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 부박한 이승의 동네를 지키는 왕소나무, 느티나무로 남게 하는 것이 그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밝히고 있다.

민족문학의 선구자

이문구는 토정 이지함이(한산이씨) 13대 할아버지이고 목은 이색의 19대손으로 언어구사가 고색 창연 했으며 한학에 능했다.

선생은 1941년 한산 이씨 가계 5백여년 세거지였던 충남 보령 관촌부락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나 남로당 충남 조직책이었던 아버지와 형이 6·25 전쟁통에 목숨을 잃자 고학 끝에 1963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선생은 “애제자도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부모 같은 분이었다. 10살 때 아버지를 잃고, 13살 때 어머니마저 잃은 상태에서 서울 생활할 때 큰 정신적 의지가 됐다”고 동리선생을 추억했다.

이문구 선생은 특히 문단의 이면사에 밝았다. 40년에 육박하는 세월 동안 선생의 가슴속에는 문인들의 자잘한 애환과 1970∼1980년대 독재정권 시절 당대의 억압에 맞섰던 저항과 분노의 격정이 차곡차곡 쌓인 것이다.

선생은 1970년대 유신 독재에 맞서 선후배 문인들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회 활동을 할 때는 뭔가 큰 일을 결행할 때 꼭 술을 마셨다고 한다. 육체적 경제적으로 온갖 피해를 입기에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남산’에 실려갈 때의 심정을 “처음에는 그냥 따라 가요. 지프차가 삼일가도쯤 가면 겁이 덜컥 나죠. 남산의 철대문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 거예요. ‘과연 저 철대문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안날 수 없었죠.”라고 지인들에게 회고했다.

그 뒤 선생은 1970년에 김지하 씨가 담시 ‘오적’을 써서 독재정권을 풍자한 것을 계기로 문인들이 민주화의 선봉에 서게 된다.

1973년 순수문학의 대부 김동리가 만든 문예지 ‘한국문학’의 편집인을 맡았지만, ‘한국문학’은 참여문학 계열 문인들의 아지트가 됐다. 이씨는 이듬해 시인 고은, 신경림, 이시영씨와 소설가 이호철, 박태훈, 송기원씨 등과 함께 ‘문학인 101인 선언문’으로 시작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족문학 작가회의의 전신)를 결성, 참여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한국문학 편집장에서 물러났지만 “문단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던 나에게는 관문 중의 관문이 동리 선생이었다”는 말로 스승에 대한 고마운 감정을 표현했으며, 98년 만들어진 김동리 기념사업회장 직을 맡아 스승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일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선생은 상복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4차례인가, 자신에게 돌아온 상을 젊은 문인들에게 양보했다. 선생은 동인문학상(수장작: '내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을 수상했을때 상금 5천만원을 사모님에게 모두 드렸다 한다. 유신 시절 ‘거마비 인생’으로 사는 와중에도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산 아내에게 ‘작은 보상’을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이문구 선생의 가족사를 담고 있는 ‘관촌수필’

'관촌수필'은 6·25의 광풍에 풍비박산이 난 선생의 가족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부친은 충남 보령의 남로당 총책을 맡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예비검속돼 처형당했다. 큰형은 이미 일제때 징용돼 실종된 상태였던 터라 둘째형이 부친과 연루돼 비명에 갔다. 셋째형은 전쟁 당시 18세의 나이였으나, 역시 빨갱이집안 자식이란 이유로 대천 앞바다에서 산 채로 수장당했다. 이같은 기구한 사연을 아는 문단동료들은 결코 대천해수욕장으로 피서가는 법이 없다.

전쟁이 끝나자 집안에서 살아남은 남자라고는 이미 팔순을 넘긴 할아버지와 넷째아들로 태어난 선생뿐이었다. 소년 이문구는 당시 "어린 마음에도 맨 먼저 다짐한 것이, 나만은 절대로 형무소나 유치장 출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살아남아서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본능이 어린 그를 짓눌렀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지난 93년에는 ‘관촌수필’이 텔레비전 드라마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있는 보령 지역에서 드라마가 일대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화제와 소란 속에서 선생 역시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 하나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소설 속 민구의 첫사랑이었던 옹점이가 드라마를 보고 혹 연락을 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관촌수필’은 걸쭉한 입담과 해학, 풍부한 전통어, 토속어, 생활어로 우리의 전통적 삶과 미학적 가치를 글로 풀어내온 작가의 대표 연작소설이다. 본격적인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던 70년대에 씌어졌으며, 농촌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아울러 도시화의 물결에 훼손당했던 농촌사회의 아픈 세태를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당시 우리 사회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수행하고 있다.

이 연작소설집의 공간적 배경은 작가의 고향인 충남 보령 관촌마을. 시간적 배경은 한국전쟁기이며, 그로부터 20여 년 뒤 고향을 찾은 작가가 옛일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통적 유교사상과 반상의식에 사로잡힌 지방 토호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몰락해가는 과정, 작가의 소설적 분신인 민구네 집안의 수난, 그 집 부엌데기 출신인 옹점이의 행로 등을 다루고 있다.

담담한 어조에 비극적이고도 절박한 스토리를 담은 이 연작집은 토속어와 한문투가 적절히 배합된 작가 특유의 문체미학이 어우러져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성과물로 평가받는다.「공산토월」등 5편을 수록했다.

이문구 선생은 생전 “소설이건 시건, 희곡이건, 수필이건 읽은 사람에게 일부라도 위로가 된다면, 쓸쓸한 사람, 외로운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 아픈 사람,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엇인가 불편한 사람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정서적으로 따뜻하게 위로가 되는 글이라면 그건 문학이고 예술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학이라고 하기에 이상하다. 예술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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